지난해 9월 7일, 로마 바티칸에서 ‘카를로 아쿠티스’ 복자가 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MZ세대의 수호자’, ‘하느님의 인플루언서’ 성인의 탄생에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환호했습니다. 그는 2006년 백혈병으로 선종한 뒤 20년이 채 되지 않아 빠르게 시성되었는데, 신앙의 고령화와 급변하는 디지털 문화에 직면한 신앙인들의 시대적 요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시복·시성은 ‘단지 필요하기에 진행이 빨라진다.’라고 설명할 수 없는, 고유한 전제와 절차를 갖고 있습니다.
시복·시성 절차에는 통상 두 번의 기적 심사가 포함됩니다. 아쿠티스 성인의 경우 자신이 살았던 이탈리아가 아닌 2013년 브라질과 2022년 코스타리카에서 일어난 치유 기적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성인품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전 세계의 많은 신자가 그의 무덤을 찾고 전구를 청해 왔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어떤 인물이 성인품에 오르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그 인물의 성덕이 알려지고, 그분께 청한 전구 기도의 열매가 기적으로 입증되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 신자들은 “순교자들은 순교하셨기에 기적이 필요 없다.”라는 말을 오랫동안 들어 왔습니다. 이는 순교 그 자체가 탁월한 신앙 증언이기에, 시복·시성 절차에서 필요한 두 번의 기적 심사 가운데 하나가 관면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103위 성인 시성 과정에서는 나머지 하나의 기적 심사마저도 예외적으로 관면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언제부터인가 “순교자들에게 기적을 청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로 곡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적이 필요 없다.’는 말은 ‘기적을 청하지 말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순교자들께 전구를 청하는 기도는, 천상 교회와 지상 교회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가톨릭 고유의 신앙 행위입니다.
최근 가경자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을 위해 많은 분이 치유의 은총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124위 복자, 조선 왕조 치하 순교 133위,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베네딕도회 덕원의 순교자 38위’도 시복·시성을 위해 ‘기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적이라는 은총의 열매를 ‘절차를 통과하기 위한 도구’로만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시복·시성만을 목표로 기적만 청하는 교회, 성인품에 모셔 놓고도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 교회, 천상 교회 와의 통공을 살아 내지 못하는 교회에서 수많은 성인이 나온다 한들,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시복·시성의 과정 이전에 우리는 순교자들께 청해야 합니다. 수많은 한국 교회의 신자들이 일상에서 우리의 순교자들에게 전구를 청하고, 그분들의 도움을 체험하며 살아간다면, 우리 교회 안에는 분명 은총의 열매들이 더욱 풍성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한 전구를 통해 일상의 기적을 체험하는 한국 교회가 하느님의 종들에 대한 시복·시성을 청한다면, 그 길이 결코 더디기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순교자들을 우리가 성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성인으로 공경하고 따르던 순교자들을 교회가 확인하여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이유는 순교자들을 위함이 아닙니다. 순교자들에게 기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기적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