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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심 앞에서

작성자 : 홍보실 등록일 : 2021-04-30 13:22:57 조회수 : 107

분심 앞에서


제가 몸담은 수도회는 활동 수도회이다 보니 공동 묵상 시간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미사 후 딱 30분입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그 짧은 시간조차도 온전히 깨어있지 못하고, 다양한 분심 속에 묵상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묵상이 끝날 무렵 너무나 송구스러워 주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요즘 주로 드는 분심이 무엇인가 분석해봤습니다. 우선, 당면한 시급한 업무들이 의외로 큰 분심거리였습니다. 묵상 시간에 앉아있으면 주말 피정 일거리들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그런 분심이 끝나자마자 다가오는 또 다른 분심이 있습니다. 아직도 떠올리기만 하면 분노로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그분’, 아직도 용서가 안 되는 또 다른 그분, 수도회 걱정, 나라 걱정. 이런저런 다양한 분심의 홍수 속에 앉아있던 어느 날,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툭 던져주셨습니다. “다 부질없단다. 다 지나간단다. 다 내려놓거라. 그저 오늘에 충실하거라.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거라.”


묵상이나 기도를 제대로 한번 시작해보려고 자세를 잡기만 하면, 어김없이 달려와 우리를 힘겹게 하는 분심, 대체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까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분심도 여러 종류였습니다.


의도적인 분심도 있더군요. 주님과의 깊이 있는 만남에 대한 열정이 처음부터 아예 없는 경우입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깊은 친교를 꿈꾼다면 공짜는 없습니다. 기도에는 열정과 정성, 몰입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묵상에 임하는 우리에게 주님과의 감미로운 만남을 위한 간절한 지향이나 의도가 조금도 없다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자연스레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기 마련입니다. 제주도로 지리산으로 갯바위로 올레길로. 그런가 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떨칠 수 없는 분심이 있습니다. 기도만 시작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그분의 얼굴, 그때의 사건, 잘 나가던 내 인생을 깊은 수렁으로 밀어넣은 그분. 이런 분심 앞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떠오를 때마다 즉시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기도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르면 분심을 적으로 여기지 말고 친구처럼 바라보랍니다. 분심을 우리 각자의 영적 현주소를 파악하게 하는 도구로 바라보랍니다. 분심은 우리가 얼마나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인지를 인식하게 합니다. 결국, 분심은 우리를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도록 안내합니다. 그러나 의도적이고 습관적인 분심은 주님 앞에 예의가 아니므로 언제나 경계해야 마땅합니다. 기도 시간에 어떻게든 맑은 얼굴로 깨어있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분심은 오늘도 내일도 다양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와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분심을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겨드려야겠습니다.


글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