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신성모독죄?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대화 상대자로 등장하여 자주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 특히 율법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바리사이들, 사제계급 출신의 사두가이들, 정치적 세력이었던 헤로데 당원과 열혈당원 등, 이들 유다인들은 하나같이 성경에 친숙했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예수님 시대에 성경이라고는, 신약의 교회가 말하는 구약성경뿐이었으나, 율법과 예언서 그 밖의 성문서에 밝았던 사람들이었기에, 예수님도 가르치실 때 이를 전제로 말씀하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성경을 잘 알고 있으니,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수없이 읽고 전해 들었으니, 성경을 통해 특별히 예언자들이 예고한 메시아를 기다려 왔으니, 예수님을 보자마자 이분이 하느님이 보내신 분임을 알아보아야 했으나, 성경을 모르던 이방인들만도 못한 동족 유다인들을 지켜보면서,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상상이 되고도 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중대한 범죄자에 대한 처벌 가운데 하나였던 투석에 임할 자세를 갖추고 있던 유다인들을 향하여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시는 말씀으로 열립니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예수님은 말씀을 포함해서 모든 행적을 성부에 뜻에 따른 것, 따라서 세상과 인류의 구원을 위한 좋은 일로 소개하시며 이의를 제기하십니다. 이에 대한 응답 속에서, 우리는 유다인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좋은 일이라는 데는 동감하나, 그 좋은 일의 참된 의미 또는 진정한 목적은 보지 못함을 주목합니다.
마음을 편하고 행복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시는 말씀, 또는 사회의 약자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가까이하시며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는 몸짓과 함께 놀라운 기적을 목격하면서, 그저 볼만한 일, 나쁘지 않은 좋은 일 정도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한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하느님이 보내신 분임을 알아보고,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 곧 구원을 선사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일찍부터 알아보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성모독으로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하느님이 하느님 모독죄로 고발되십니다. 사실 이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율법의 제정자이신 하느님이 엉성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법에 의해 사형을 선고를 받으시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 일들은 바로 세상과 인류 구원에 관한, 세상과 인류 구원을 위한 일들, 곧 아버지의 일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안에서 아버지의 일들을 볼 수 있다면, 마땅히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며, 하느님 아버지 모독이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우리는 믿어 고백합니다.
사순시기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그 어느 때보다 기도 안에서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인지 살피고, 우리의 말과 행동을 보고 이웃들이 하느님을 뵐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우리가 뵙게 할 수 있도록 더욱 마음을 다잡고 정진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 하루, 그러한 마음으로 신앙인의 삶을 거침없이 펼쳐나가는 소중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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