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을 거의 모든 사람이 사용할 것입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약간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근시가 심한 사람은 스마트폰을 눈 가까이에 가져다 놓고 보고, 돋보기를 써야 하는 원시가 심한 사람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서 봅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에게 맞는 거리에 두어야 제대로 볼 수가 있습니다. 만약 정상인 사람이 스마트폰을 자기 눈에서 10cm 정도만 떼어놓고 본다면 어떨까요? 가까이 있지만 스마트폰의 화면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빛 때문에 눈물이 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 거리를 10m 정도 떼어놓고 본다면 어떨까요? 이번에는 너무 멀어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조금이라도 그 내용을 보려고 온갖 인상을 쓰게 될 것입니다.
자기에게 맞는 거리가 있습니다. 잘 보이는 거리,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스마트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또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런데 완전히 눈을 붙여 놓고 보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가까이에서 봤는데….”
부정적인 마음이 생겼을 때, 특히 누군가를 판단하게 될 때, 지금 제대로 볼 수 있는 간격을 두고 있는지를 따져 봐야 합니다. 그 간격을 무시하면서 보는 우리의 판단은 모두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3년 동안 먹고 마시면서 가까이에서 생활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직접 뽑은 12명의 제자입니다. 가까이에서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신앙의 모범을 보여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 유다 이스카리옷이 있었습니다. 또 제자 중에서 으뜸으로 뽑았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증언하기도 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붙잡히자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에 우리 모두 충격을 받습니다.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보았던 사람도 배신하고 도망친다는 것을 믿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까이에만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주님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거리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받아들였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고,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둠 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십자가의 거리가 필요합니다. 무조건 주님께서 주시는 영광만을 원하는 삶이 아니라, 십자가의 거리를 통해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야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완벽함이란 더 이상 보탤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완성된다(생텍쥐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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