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26,14-25
배신의 죄 중에도 희망을 가집시다!
혹시 누군가로부터 크게 배신당해 본 적 있으신가요? 내가 그토록 믿고 신뢰하고, 사랑을 건네고 지지하고 격려했었는데, 내 인생 전체를 걸었는데, 결국 돌아온 것은 배신이요, 큰 뒤통수 한방일 때, 그 참담함과 치욕감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내 인생이 와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느낌입니다.
제자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신 앞에 스승 예수님께서 느끼셨을 배신감과 당혹스러움,
안타까운 심정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는 성주간입니다.
유다도 배신했지만 수제자 베드로 사도도 배신했습니다.
더구나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배신했습니다. 그런데 배신의 최종적인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베드로는 돌아왔지만 유다는 떠나갔습니다. 베드로는 하늘나라에서 영영세세 스승님과 함께 하며, 천국의 열쇠까지 쥐고 있습니다만, 유다의 영혼은 하느님 자비의 품마저 걷어차 버렸습니다.
똑같은 배신자이면서도 두 사람의 미래가 그토록 차별화된 배경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배신의 죄 중에도 희망을 가졌습니다. 스승님의 큰 사랑과 자비 앞에 내 죄는 반드시 용서될 것임을 희망했습니다.
반대로 유다는 자신이 저지른 배신의 죄 속에 파묻혀 희망조차 버렸습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이 없어 보여도 희망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의정부 교구장이신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전통적으로 지옥은 불이 훨훨 타오르고, 머리에 뿔이 돋고 궁둥이에 꼬리 달린 마귀가 꼬챙이로 사람들을 불 속으로 계속 밀어 넣는 것이라고 상상해 왔다.
그러나 지옥은 다른 곳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이 사라진 곳이다.”
“중세 이탈리아 작가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가 저술한 ‘신곡’ 지옥편에 보면, 지옥의 문간에는 ‘이곳에 들어오는 자들이여!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라는 글귀가 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없는 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말이다.
이런 의미의 지옥은 이미 현세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
한 가정 안에서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이 서로 믿지 못하고 의심하면서 미움과 증오 속에 산다면, 또 그런 뒤틀린 관계가 개선될 희망이 전혀 없는데도 계속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야 한다면, 그것이 바로 ‘생지옥’이 아닐까?
인간에 대한 신뢰와 희망이 사라진 곳에서 지옥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손희송,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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