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동아 제약의 박카스 광고가 생각납니다.
대학생 둘이 시험을 모두 마치고 친구들과 신나게 농구합니다. 문제는 농구하다가 발목을 겹질려서 쩔뚝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상황입니다. 지하철을 탔는데 빈자리가 전혀 없고 노약자석만 비어 있습니다. 친구는 다리가 아프니 여기에라도 앉으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다리 아픈 친구는 지하철 손잡이에 철봉 하듯이 매달리며 말합니다.
“저긴 우리 자리가 아니잖아!”
바로 그 순간 성우가 이야기하지요.
“젊음! 지킬 건 지킨다.”
지킬 것을 지켜야 건강한 사회가 됩니다. 그런데 지킬 것을 지키지 않으면서 여러 이유를 말할 때가 많습니다. ‘나 하나쯤이야.’,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나만 손해 볼 수는 없지.’, ‘뭘 믿고 저렇게 행동하는 거야?’ 등등의 이유가 붙게 됩니다.
나만의 법칙이라 할 수 있는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모습’을 내세우면서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건강할 수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도 원하시는 사회는 지킬 건 지키는 사회였습니다. 특히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 모두 건강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킬 것을 지키고 계십니까? 하느님 법칙 안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법칙, 그리고 나만의 법칙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이는 과거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공생활을 하고 있을 때, 제자들은 세상의 그 누구보다 자기들이 가장 믿음이 굳세고 주님을 절대로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수난 하시고 죽으신 뒤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그 누구도 믿지 못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에 관한 말씀도 믿지 못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부활 증언을 믿지 않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증언 역시 믿지 않습니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꾸짖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락방에 숨어 벌벌 떠는 모습이 아닌,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힘들어하는 모습, 사랑의 주님을 믿지 못하는 모습을 모두 버리고 지켜야 할 것을 지키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우리는 주님 보시기에 지킬 것을 지키는 사람일까요? 큰 반성을 하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순간이면 충분하다. 아무리 짧은 순간도 충분히 의미 있을 수 있고 이를 통해 삶에 만족할 수 있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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