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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2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04-29 조회수 : 123

4월29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요한 3,7ㄱ.8-15 
 
뜬구름 잡는 신학 지상으로 끌어내리기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신학자라는 이름만으로 믿어서는 안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도 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뜬구름 잡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연구를 하면서 신자들에게 혼동을 주는 이들이었습니다.
오늘 그중의 한 명,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왔습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유를 니코데모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는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신학을 하는 방식을 질타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예수님은 세상일을 먼저 알아듣지 못하면 하늘의 일은 알아들을 생각을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뜬구름 잡는 신학에서 벗어나는 법입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신학을 지상 것에 비유하지
못하면 당시 신학자들처럼 예수님도 못 알아보게 하는 학자들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다시 모세 때의 구리뱀 이야기하며 당신이 이를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아시는 신학의 표현 방법이었습니다.
이것 없이는 언제나 추상적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하며 사람을 잘못 이끄는 스승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1978년 11월 18일 가이아나 정글에서 일어난 ‘존스타운 비극’은, 현실 속 삶에 뿌리내리지 못한 ​말뿐인 구원론이 얼마나 치명적 결과를 낳는지를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 
 
1950년대 인디애나에서 출발한 ‘피플스 템플’의 창립자 짐 존스는 초기엔 빈곤층을 돌보고 인종 통합을 실천하며 매력적인 설교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자신을 “살아 있는 하느님·영적 아버지”로 격상시키고, 신자들을 데리고 캘리포니아를 거쳐 남미 가이아나로 이주해 ‘피플스 템플 농업 공동체(존스타운)’를 세웠습니다.
그곳이야말로 “차별도 자본주의도 없는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요, “하느님 나라가 지상에 현현한 곳”이라 선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씨앗, 누룩, 빵과 포도주처럼 손에 잡히는 현실 표징으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반면 존스의 설교는 구체적 인간 경험을 떠난 추상 구호(평등, 해방, 혁명)만 난무했습니다. 언어는 현실을 비추는 ‘비유’가 아니라 신자들을 현실에서 떼어내 포획하는 ‘슬로건’으로 변질하였습니다.
말이 육화(肉化)되지 않으니, ‘말의 신학’이 ‘말살 신학’으로 뒤바뀐 셈입니다.  
 
예수님은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비유를 통해 진리를 전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권위를 내세우며 무작정 믿으라는 식의 가르침은 진리를 전하는 방식에 위배됩니다.
짐 존스와 다른 사이비들이 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말씀’ 대신 녹음된 존스의 연설이 밤낮으로 울려 퍼졌고, 성체성사 대신 시안화물(Flavor Aid)가 ‘구원의 잔’으로 돌려졌습니다. 
 
“미국 정부가 우리를 학살하러 온다”는 음모론, 반복된 ‘화이트 나이트’(가짜 집단 자살 리허설)는
신자들에게 심판 공포를 내면화시켰습니다.
결국 미 하원의원 레오 라이언 의원 일행이 조사하러 오자 그들을 살해하고, 이어 918명이 독극물을 강제·자발적으로 복용하여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위로부터 새로 나야 하고 새롭게 태어나도록 누군가는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잘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엄마’가 자녀에게 하는 희생과 같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젖과 가르침이 없이는 아이는 새롭게 태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미 많이 설명해 드렸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더 높은 새로운 태어남은
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학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어느 마을에 밤하늘의 별을 연구하는 점성가가 살았습니다.
그는 별들의 움직임을 통해 세상의 이치와 미래를 알 수 있다고 믿었고, 사람들은 그를 현명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밤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자리의 비밀을 캐는 데 몰두했습니다.
그의 지식은 온통 저 멀리 하늘,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추상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점성가는 여느 때처럼 하늘의 별을 관찰하며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과 생각은 오로지 하늘의 신비에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땅 위의 일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죠.
바로 그때, 그의 발밑에 깊은 우물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점성가는 그만 우물 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그를 발견한 한 마을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하늘의 이치는 꿰뚫어 본다는 양반이 어찌 자기 발밑의 우물 하나 보지 못했소?”
점성가의 지식은 하늘의 이치를 논할 만큼 고상하고 추상적이었을지는 몰라도, 정작 그가 발 딛고 선 현실의 위험 앞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존스타운이 말하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삶을 가르치지 못하는 신학은 결국 죽음에 이르는 언어의 유희일 뿐입니다.
빛은 하늘에 있지만, 나의 발길을 비추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실생활과 분리된 신학은 위험합니다.
존스타운은 사람들은 실생활에서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가르침은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신학은 알아듣기 쉬워야 합니다.
세상에 내려와 내 삶을 바꿔주는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삼위일체가 ‘삼위요, 한 분 하느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삼위가 세 분이란 뜻입니다. 
 
옛날 옛적에 옷을 너무나 좋아하는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기꾼 두 명이 찾아와 자신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감을 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옷은 특별해서, 자기 직위에 걸맞지 않거나 구제 불능의 바보에게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임금님은 솔깃했습니다.
신하들의 능력과 백성들의 지혜를 시험해 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죠. 
 
사기꾼들은 빈 베틀 앞에서 열심히 옷감을 짜는 척했습니다.
임금님은 신하들을 보내 옷감이 얼마나 멋진지 보고 오게 했습니다.
신하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이 직위에 맞지 않거나 어리석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두려워 앞다투어 옷감의 무늬와 색깔이 얼마나 훌륭한지 거짓으로 칭찬했습니다.
임금님도 직접 보러 갔지만,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임금님 역시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 위해 옷이 정말 훌륭하다고 감탄했습니다. 
 
마침내 새 옷을 입고 거리 행진을 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임금님은 벌거벗은 채였지만, 모든 신하와 백성은 옷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 채 옷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목청껏 외쳤습니다.
그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나만 바보이고 무능한 사람으로 보일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죠.
그들의 지식과 판단은 ‘보이지 않는 옷’이라는 실체 없는 관념과 집단적 허영심에 완전히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현실(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명백한 사실)은 철저히 외면되었습니다. 
 
이 파멸적인 침묵과 자기기만은 한 어린아이의 순수한 외침,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라는, 현실에 기반한 진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나서야 깨졌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안 보이는 것입니다. 허상입니다.
누군가 무언가를 가르친다면, 구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어야 받아들이십시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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