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기 위해 믿을까, 믿기 위해 행동할까?
오늘 복음에서는 구원이 행위보다는 믿음으로 온다는 주제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예수님은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받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행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은 빛으로 나아옴입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행위는 빛으로 나아오는 자격증과 같습니다. 행위가 옳지 못하면 자기 잘못이 드러날까 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나아올 수는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특별히 어머니가 병원에 계시고, 계단을 오를 수 없어 집을 바꿔야 하는 상황에서 더 많은 분들이 고생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서로 돕겠다고 나서서 행복한 고민이 생깁니다.
누구에게 더 시키고, 누구는 덜 시키고 하면 거기에서 차별받는 것처럼 여겨서 나아오지를 못합니다.
저는 이미 그분들이 저에게 해 주신 일들에 고마워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다름이 없는데,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하지 못하면 그만큼 제가 다른 사람들을 더 신임한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지금 본당에 계신 분들도 저를 많이 도와주시지만, 이전 본당에 계신 분들도 도와주십니다.
그러면 지금 본당에 계신 분들이 섭섭해하고, 새로운 분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이전분들이 섭섭해하십니다.
이분들은 행위에 지나친 가치를 두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이 저를 돕는 행동을 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입니다.
저에게 합당한 존재라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믿음입니다.
제가 별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감사해야 하는 존재임에도 저에게 다가오려는 분들은 무언가 일을 해야만 저에게 합당하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들이 일을 하는 것은 저에게 다가오기 위한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행위에 지나치게 가치를 두는 분들은 언젠가는
믿음을 키우지 못한 덕으로 더는 다가올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우리를 쫓아내실까요?
우리 자신의 양심이 그분께 가기를 막을 것입니다.
행위에 치중해서는 안 됩니다.
안식을 규정을 지키려다가 안식일의 주인인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생각해보십시오.
헌금을 보여주기 행위로 왜곡, 거짓이 드러나 심판을 자초(사도 5,1-11)한 아나니아스와 사피라도 있습니다.
성실한 노동을 내세우며 아버지의 무조건적 사랑을 이해 못한 탕자의 비유에서의 맏아들도 생각해보십시오(루카 15,25-32).
행위는 사랑을 믿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이름도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행복임을 믿어야 구원에 가까워질 수 있고, 성체성사도 의미 있게 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
물 위를 걷다 빠지고, 세 번 부인도 했지만 회개로 더욱 굳건한 반석이 된(마태 14,28-33; 요한 21,15-19) 베드로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자기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던 시몬을 생각해봅시다.
성경엔 나오지 않지만, 그 십자가를 함께 지며 영화에서는 예수님께 대한 묘한 감정을 느낍니다.
자비를 실천해 보니까 자비가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행위는 이와 같아야 합니다.
사랑의 행위가 행복임을 느끼기 위한 시도여야 합니다.
결국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심판받습니다.
그 믿음은 성체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지, 성체를 통해서는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체도 그분의 살과 피입니다.
그것을 영하기에 먼저 합당한 존재라는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올바른 행동이 필요한 것입니다.
보기에 위험해 보이는 다리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다리를 살살 건너봅니다.
괜찮습니다.
다시 건너봅니다.
또 괜찮습니다.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생깁니까?
다리가 겉보기에 불안해 보여도 안전하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성체성사에 합당한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선한 행동을 강화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 착한 뜻이 그분께 다가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