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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05-01 조회수 : 51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의 부모는 새로운 세상에 들어와서 무작정 먹어서
‘돼지’가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치히로는 음식을 함부로 먹지 않습니다.
그 값을 반드시 치러야 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그냥 돈으로 내기만 하면 되는 줄 압니다.  
 
치히로는 부모가 돼지가 되어버리니 자기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이름을 잊어버립니다.
그러자 몸이 조금씩 투명해집니다.
자신이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치히로는 자기 이름을 되찾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게 됩니다.
돼지가 된 부모를 되돌리기 위해서. 이것이 일의 중요성입니다.  
 
오늘은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목수’라는 직업으로 소개됩니다.
그가 목수로 무슨 일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일해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부양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요셉에게 일이란 것이 예수님과 성모님에게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일에는 항상 ‘양식’이 따릅니다.
양식을 받지 않고 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일하셨습니다.
부활 대축일 미사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왜 일하려고 하셨을까요?
성체를 영했기 때문입니다.
성체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줍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아담은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했어야 합니다.
이 일을 하지 않고 먹는 과일은 선악과가 됩니다. 죄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와 마찬가지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데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라고 말하며 일과 먹는 것을 연관시킵니다.
바오로에겐 먹는 목적이 생존이 아니라 일인 것입니다.
일을 하지 않는다면 삶의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뜻이 됩니다.  
 
왜 먹는 것과 일이 직결될까요? 양식 안에는 사명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유튜브에 엄마들이 호주에서 공부하는 자녀들을 위해 평소에 먹던 음식을 준비해서
몰래카메라로 식당에서 음식을 대접했을 때 자녀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어머니의 음식은 피가 서려 있습니다.
그 피가 양식이 되게 합니다.
양식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 뜻을 따르지 않으면 어머니에게 합당한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
돼지가 되는 것입니다.
음식은 정체성을 주고 정체성은 사명을 줍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우리 양식으로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하면서도 일에 대한 부담이 없는 이유는 성체를 양식이 아니라 음식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마치 내가 봉헌금을 냈으니 당연히 먹어도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봉헌은 내가 받은 것에 대해 내가 드릴 수 있는 감사이지, 그것이 성체의 값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느끼기만 하면 하느님의 뜻을 찾습니다.
저도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성체에서 말씀하실 때, “그럼 제가 무엇을 해 드려야 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성체는 당연히 일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왜 이 단계까지 오지 못하느냐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더 드리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성체를 제대로 영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식의 목적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함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전에 뉴스에 경찰관이 불이 난 집에 홀로 계신 할머니를 구한 일이 나왔습니다.
마치 가족과 사회에 그것을 하지 않으면 부끄러워져 합당한 존재가 아닌 것처럼.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받은 것에 보답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주어지는 양식은 물론이요, 시간과 모든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에너지입니다.
이것을 먹고 마시고 합당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양심이 그 사회에 속하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먹으면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다가갈 힘을 얻기 위해 준비하는 존재들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양식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이것에 감사하다면 그 열매를 맺어야 당연합니다. 주인이 맡긴 달란트(재능, 기회, 은총 = 일종의 '양식')를 가지고 수동적으로 있거나 숨겨둔 종과 달리, 이를 활용하여 '일하고' 이윤을 남긴 종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것을 가지고 그분의 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할 책임(사명)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받은 것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일'을 강조합니다.  
 
양식은 ‘어머니의 도시락’과 같습니다. 어머니는 도시락을 왜 싸 주는 것입니까?
공부하라고 싸 주시는 것입니다.
도시락을 통해 자신이 어머니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이 정체성이 없다면 부모의 자녀의 자격을 잃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자녀입니다.
각 공동체에서 주어지는 양식이 있고, 그 양식에 합당한 일이 있습니다.
이 둘을 거부하면, 먹지 않으면 내가 누구인지 모를 수 있고, 더 나아가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
일하지 않아도 돼지처럼 그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존재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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