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의 문
오늘 우리가 읽고 묵상하는 복음 말씀은 예수님을 착한 목자에 비유하여 소개하는 요한복음 10장의 시작 부분입니다.
이 비유 말씀의 출처를 찾아 올라가면, 구약시대 바빌론 유배지에서 소명을 받고 예언자로 활동한 사제 에제키엘의 작품에(에제 34장) 이를 수 있습니다. 에제키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국땅 바빌론으로 끌려와 유배라는 처절한 징벌 속에 놓이게 된 모든 책임은 사악한 지도자들에게 있음을 고발하면서, 하느님이 친히 내 양떼를 찾아서 보살피는 착한 목자로 나서실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복음저자 요한은 이 비유 말씀을 예수님께 적용함으로써, 예언자의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밝히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 등장합니다. 목자는 낮에는 양들을 이끌고 나가 방목하다가, 밤이 되면 간단한 울타리가 쳐진 양 우리로 모아들여 늑대나 여우와 같은 사나운 짐승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키곤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양들을 치기 위해 양 우리에서 들판으로 끌어내거나 모아들일 때 사용하던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와는 달리,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하는 단죄의 말씀으로 입을 여십니다.
오늘 말씀의 일차적 청중, 곧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는 문구에서 너희는 9장 13절부터 등장하는 바리사이들로서(10,6 참조), 에제키엘서에 나오는 사악한 지도자들과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양 우리 안으로 들어가서 오로지 자기들의 이익만을 위하여 양들 위에 군림하거나 처리하려는 자들입니다. 또다시 유배와 같은 죽음의 세계로 몰고 가는 자들입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데에는 애정이, 사랑의 목소리가 전제되며, 그 사랑에 대한 응답이 바로 따름입니다: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사실, 양이라는 동물은 시력이 나쁘고 방향 감각이 없어 혼자의 힘으로는 생존이 거의 불가한 가축입니다. 늑대나 여우 등은 이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먹이로 취했으며, 이에 따라 목자들은 양치는 개를 훈련시켜 도움을 받아왔으며, 다행히 귀는 밝아 목자의 음성을 잘 알아듣고 졸졸 따라다니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끝내 예수님은 다시 이르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처럼 착한 목자 이상으로 당신이 바로 구원의 문이심을 밝히십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대상인 바로 인간과 똑같은 존재가 되심으로, 영원한 생명이라는 하느님의 선물을 발견할 수 있는 문, 또 그 선물을 나누어 주고받을 수 있는 문이심을 밝히십니다. 예수님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따르기 위해 애쓰는 우리로서는 예수님이라는 구원의 문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구원의 세계를 맛보는 행복에 젖어 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예수님을 좀 더 깊이 알고 좀 더 가까이 따르는 몸짓이 될 수 있도록 소중히 다스려 나가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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