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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1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05-19 조회수 : 113

성령께서 오시면 깨닫게 되는 진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라고 하십니다.
반면 세상에는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은 여기에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십니다.
성령께서 당신이 선택한 이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계명을 지키면 성령을 받고 성령을 받으면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일까요?  
 
우선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자녀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전에 중국 길거리에서 찍힌 어떤 사진에서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엄마가 사주지 않자 엄마의 목을 조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아이는 어머니의 참모습을 보고 있는 것일까요?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자기 뜻을 어머니에게 강요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만약 계속 그렇게 자란다면 세상에 적응할 수 있는 모습이 안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 욕구만 강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어떤 면에서 어머니에게 성령을 받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어머니의 참모습, 참마음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어머니의 자녀를 위해 흘린 피입니다.
이 피를 받을 때 보이는 게 있고 그 피를 주신 분이 바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요나’ 예언자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려는 이에게 성령께서 어떻게 당신의 참모습을 드러내시는지 잘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향하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
(요나 1,2) 그러나 요나는 주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당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주님 앞을 피하여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요나 1,3) 길을 떠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거센 풍랑과 큰 물고기 배 속에서의 사흘 밤낮은 요나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완전히 꺾고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만드는 시간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 한 마리를 마련하시어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 2,1) 
 
절망 속에서 요나는 비로소 “저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당신께 제물을 바치고 제가 서원한 것을
채우렵니다.
구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요나 2,10) 하고 부르짖으며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기로 합니다. 
 
마침내 요나가 니네베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자, 놀랍게도 임금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회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요나 3,10)
이 모습을 본 요나는 “몹시 못마땅하여 화가 났습니다.” (요나 4,1)
그는 여전히 자신의 생각과 기대 속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박넝쿨 하나를 통해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하룻밤 사이에 자라나 요나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었던 박넝쿨이 벌레 먹어 시들자 요나는 또다시 화를 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박넝쿨 때문에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네베를, 왼손과 오른손도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여 명이나 되고
가축도 많이 있는 이 니네베를 내가 어찌 아끼지 않겠느냐?” (요나 4,9.11) 
 
요나는 이 박넝쿨 사건을 통해 비로소 하느님의 마음, 그 끝없는 자비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그토록 아꼈던 박넝쿨처럼, 하느님께서는 니네베의 수많은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는 요나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계명에 자신을 내어 맡겼을 때 비로소 체험하게 된 하느님의 참모습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성령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고래에게 먹히는 것도 성령의 체험이고 박나무의 체험도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아니라 주님 마음을 볼 의지가 살아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도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됩니다.
그 순간 이제 나의 욕구가 아닌 그분의 욕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제가 무엇을 해 드리면 될까요?”라고 묻게 되었고 그렇게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는 가지다.
그냥 내게 붙어있어라.”라고 하시며 당신을, 곧 당신의 뜻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있기 전에 저는 예수님의 계명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사제가 되라는 뜻에 저를 맡긴 것입니다. 그랬더니 성령께서 들어오시고 그리스도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신다는 뜻은 자신의 뜻보다 그분의 뜻에 관심을 쏟게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 계명에 순종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할이 있습니다. 도움의 은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당신 마음을 보게 하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이 은총이 생명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이 두 성령의 은총을 통해서 주님 마음을 닮은 사람이 되어갑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당신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고 당신 마음을 바라볼 수 있게 하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느님은 전부”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마음은 진정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하라 하는 계명이 아니라 나를 사랑해서 무언가를 하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보는 것이 기도에서는 ‘관상’입니다.
관상기도는 그래서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기도입니다.
여기에서 본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갈 때 그 사람은 길을 잃는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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