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와 가지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자주 포도나무에 비유되곤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택을 비유하기에 좋은 표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심으시고 보호하시기에 이 포도나무는 좋은 열매, 곧 정의와 거룩함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러한 열매를 맺지 못했음을 고발하며. 그 대표적인 예를 구약성경의 그 유명한 시, 예언자 이사야의 포도밭 노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이사 5,1-7).
요한복음에서는 이 표상이 더욱 발전하여,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참포도나무로 계시됩니다. 아버지가 농부로서 직접 가꾸시는 나무이니, 이 포도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신앙을 통하여 예수님과 연결되는 제자들과 신앙인들 또한 좋은 열매를 맺어 하느님의 사랑에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농부로서의 하느님, 땀 흘려 일하시는 하느님의 모습 또한 인상적입니다. 하느님이 (고대 근동의 신화 속에서 지고의 신에게는 금기시되어 있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신다는 것은 그만큼 아드님을, 아드님을 통하여 신앙인들을 사랑하신다는 뚜렷한 몸짓입니다.
농부 아버지는, 모든 포도밭 재배자들이 그렇게 하듯이 - 꼭 그렇게 해야 하듯이 -,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치십니다. 목적은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심에 있습니다. 여기서 아직 단죄와 응벌의 몸짓을 내다볼 필요는 없습니다. 더 많은 열매, 더 좋은 열매를 맺게 하고자 하는 농부의 의도와 수고만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포도나무가 아니라,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할 가지입니다. 붙다라는 동사는 어찌 보면 너무나 일반적인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신명기가 이 동사를 통하여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설명하기 시작한 이래, 하나의 신학적인 용어로 자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이 동사를 두 번 언급한 다음에(2절과 3절),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머무르다 동사를 즐겨 사용합니다. 붙어 있어야만, 다시 말해서 머물러 있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나아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농부이신 아버지로부터 시작됩니다. 유일한 참포도나무가 푸르름을 자랑할 수 있도록 농부이신 아버지가 일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포도나무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에 그 푸르름을 그대로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드님, 아드님과 그를 믿는 이들의 일치와 사랑을 드러내주는 비유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당신께 늘 붙어 있기를,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선택의 의미와 의도를 깊이 깨달아 가슴에 담고 살아가기를, 바로 그것이 많은 열매를 맺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길임을 독려하시며 일러주십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께 붙어 있기를 꺼려하거나 마다했던 시간들을 뒤로 하고, 굳건한 믿음으로 늘 주님 안에 머무는 가운데 부활 신앙을 힘껏 드러내고 자랑하는 벅찬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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