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20,19-23
성령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오늘 묵상할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라고 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치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이 땅에서 매고 푸는 권한을 주셨듯이,
이제는 성령을 주시며 사도들에게 매고 푸는 권한을 주십니다.
이 성령 강림을 통한 죄사함의 권한이 교회에 맡기심을 믿지 못하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도 부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항상 “사람이 어떻게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라고 말하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마르 2,7; 루카 5,21).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면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야 성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아이가 집의 귀중한 물건을 깨서 부모에게 용서받았다고 해봅시다.
그 아이는 또한 형제나 나중에 낳게 될 자기 아이에 대한 용서의 의무가 생기게 됩니다. 예수님은 일만 탈렌트의 비유로 이를 잘 알려주셨습니다.
왜 용서받으면 용서해야 하는 ‘의무’가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이 사랑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때 성령의 상징은 ‘흐르는 물’입니다. 갈릴레아 호수는 물이 흐릅니다.
그래서 생명이 넘칩니다.
반면 사해는 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은 바다가 되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요르단강 끝부분, 곧 갈릴레아에서 물이 흘러 사해로 들어가기 직전의 위치에서
이뤄졌습니다.
죽은 물로는 세례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태아가 죽은 물 안에서 자랄 수는 없습니다.
물도 죽은 물이 있고 산 물이 있는데, 살아있는 물은 흐르는 물이어야 합니다.
성령도 흐르는 물처럼 교회에 부어졌습니다. 그러면 교회도 용서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는 것입니다.
용서해야 하는데 용서할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물은 마른 땅, 낮은 땅으로 흐릅니다.
만약 세상에 죄가 없었다면 그것을 이기는 힘을 주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래서 죄 때문에 성령께서 오신 것이고 이 때문에 부활 성야 때는 아담과 하와의 죄를 ‘복된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코리텐 붐을 생각해봅시다.
그녀는 자신이 용서하지 못할 사람과 마주
섰습니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때 그를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내린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렇게 써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공관복음은 공통으로 네 명이 중풍 병자를 들것에 옮겨와 예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와 병의 치유를 받는 이야기를 전합니다(마태 9,1-8; 마르 2,1-12; 루카 5,17-26). 이 치유 사화는 ‘죄의 용서’와 ‘병의 치유’가 별개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같은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보시며,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실 때, 율법학자들은
‘사람이 어떻게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에게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겠다고 하시며 중풍 병자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9,8)라고 말하며 그리스도 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 곧 교회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조금 주시는 것이 아니라 ‘전부’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25)라고 하시는 것처럼, 사랑하면 ‘다’ 주어야 합니다.
성령은 한 분의 하느님으로서 나뉘실 수 없습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호수로서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당신의 전부인 ‘피(성령)’를 통한 죄 사함의 권한을 온전히 행사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인한 말씀의 선포와 성사의 거행이 멈춘다면 더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마치 계단식 논처럼 창조자는 모든 땅에 물이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부모가 한 자녀를 용서하면 그 자녀도 동생을 용서하기를 원합니다.
모두의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위로부터 흐르는 물입니다.
그러니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는 교회라면 이미 죽은 교회입니다.
어떤 임금이 자기만 물을 가지려고 하는 이에게 생수를 흘려보내겠습니까?
교회 시작부터 분명히 죄를 용서하는 권한으로 파견한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용서의 통로입니다.
흐르지 않으면 은총이 멈추어 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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