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6,12-15
삼위일체에 참여하는 방법: 진리의 전달자가 되는 것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이러한 축일을 교회가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고 이해하고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삼위일체 신비만 처음부터 벽에 부딪힙니다.
대부분 성 아우구스티노가 바다에서 조개로 바닷물을 웅덩이에 옮기는 아이 이야기를 비유로 들며, 삼위일체를 이해하려 하는 것은 아이가 조개로 바닷물을 퍼서 웅덩이에 퍼서 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위로 끝내버립니다.
이렇게 나타난 현상이 무엇이냐면 삼위일체의 기초조차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느님은 몇 분이세요?"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한 분이요!"라고 대답합니다.
만약 103위 성인을 한 분이라고 하면 말이 될까요? "103분이시죠!"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103위는 103분이라고 말하며, 왜 3위는 한 분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는 우리 신앙고백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전혀 기본이 되어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삼위일체 신비에 대해 이렇게 무관심하게 되었을까요?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는
노력이 끝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전에 ‘사랑의 이해’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결론은 ‘사랑은 용기다’였습니다.
용기를 내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10년 동안 돌고 돌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 얼마나 좋습니까?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분명 누군가가 말해 놓은 사랑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정의는 ‘사랑은 받아서 전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르침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영께서 오시지 않으면 지금 당신께서 하시는 말씀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을 당신이 받아 성령께 드리면 성령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것이 삼위일체라는 뜻입니다.
삼위일체만이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려면 삼위일체 신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받은 진리를 전해주어야 합니다.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세라는 아버지로부터
큰 사랑과 함께 "너는 공주란다"라는 소중한 정체성을 선물 받습니다.
그러나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모든 것을 빼앗긴 채 하녀가 되는 시련을 겪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세라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심어준 정체성과 이야기를 다른 아이들에게 전해주기
시작합니다.
"아빠가 그랬어. 모든 소녀는 다 공주야." 이 말은 아버지에게서 나온 진리이자, 세라를 통해 아이들에게 흘러 들어간 희망이었습니다.
이로써 '아버지-세라-아이들'은 이야기 안에서 희망으로 굳게 하나가 됩니다.
한편, 기억을 잃은 아버지가 바로 곁에 있었지만 세라를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세라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진리를 아이들에게 충실히 전하며 그 진리대로 살았기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빠는 세라가 경찰들에게 끌려갈 때 기억이 되돌아온 것입니다.
세라가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며 아이들과 하나가 되었을 때, 단절되었던 아버지와도 다시 온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부의 말씀을 성자를 통해 받아 성령 안에서 나누며 살아갈 때, 이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게 되며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알아보게 하는 기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도로시 데이(Dorothy Day)는 무신론자였고 오늘을 즐기자는 자유분방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러다 딸 테레사(Tamar Teresa)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지식으로는 딸에게 알려줄 게 한계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남편이 극도로 반대하였음에도 그녀는 딸에게 더 높은 진리를 전수해주기 위해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남편은 그녀를 떠났지만, 그녀는 남편 대신 아이를 위해 종교를 선택하였습니다.
보통 자신들이 전해 주는 것을 통해 하나가 되는 예는 남편-아내-아이가 됩니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 대신 하느님의 진리를 전해 주고 싶어 한다면 하느님-엄마-아이가 됩니다.
내가 가르치고 싶은 진리를 가진 대상을 받아들이게 될 때 그렇게 삼위일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는 신앙을 통해 자신이 받은 진리를 사회에 확장했습니다.
감옥에 여러 번 다녀오기도 했지만, 그 삶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시성 절차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사랑의 법칙이 아닌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이 사랑의 원리가 삼위일체입니다. 이것을 계시해 주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를 배워나가지 않으면 더 큰 사랑으로의 확장은 불가능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지식을 전수하시며 모든 이를 삼위일체 신비에 끌어들이십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그를 모든 민족의 복이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는 복으로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당신과 세상과의 중간에서 참사랑의 지식을 전해 주는 삼위일체의 중개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진리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 곧 본성상 하느님이 된다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전할 때 많은 박해도 받겠지만, 결국 삼위일체 사랑에 참여하게 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어떻습니까? 처음에 아버지로부터는 참사랑의 지식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나병환자를 정말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아버지로 정하고 나서는 그 참사랑의 지식을 나병환자를 끌어안고 씻어주며 전해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전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삼위일체 신비에 들어가는 것이고, 삼위일체 신비에 들어가야 비로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참사랑의 진리란 우리도 삼위일체 본성에 참여할 수 있는 신성을 지닌 존재가 된다는 진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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