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5,3-7
거룩한 마음이란 남편의 마음을 자녀가 느끼게 하려는 아내의 마음이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님의 마음, 성심(聖心)을 기념합니다.
우리는 예수 성심을 ‘자비로운 마음’,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사랑의 마음’ 등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예수 성심을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바로 “예수 성심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들이 공유하게 하려는 마음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한 가정의 어머니의 마음과 같습니다.
지혜롭고 사랑이 깊은 어머니는 자녀들이 자신만 사랑하고 따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녀들이 아버지의 깊은 사랑과 마음을 알아주고, 아버지를 존경하며 사랑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머니의 가장 큰 기쁨은 온 가족이 아버지의 마음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그 증거입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습니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의 기쁨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외칩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루카 15,6)
왜 굳이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함께 기뻐하자”고 청할까요?
혼자 기뻐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 예수 성심의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여기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느끼는 기쁨은, 근본적으로 양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하늘이 기뻐하기에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느끼게 해 주고 싶은 것입니다.
동화 ‘라푼젤(Tangled)’에서 라푼젤은 본래 샐러드용 채소의 이름입니다.
라푼젤의 어머니는 임신했을 때 마녀의 정원에 자라는 '라푼젤'이라는 채소가 너무나도 먹고 싶어 병이 날 지경에 이릅니다.
남편이 아내를 위해 목숨을 걸고 마녀의 정원에 들어가 이 채소를 훔쳐오고, 결국 태어날 아이를
마녀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채소를 얻게 됩니다. 마녀는 이렇게 얻은 아이에게 그 채소의 이름을 따 '라푼젤'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라푼젤을 향한 마녀의 사랑은 겉보기에 완벽합니다.
다정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며,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엄마가 제일 잘 알지. 바깥세상은 무섭고 위험하단다.
엄마 품이 가장 안전해.” 그녀는 라푼젤의 진짜 부모에게 가는 길을 철저히 차단합니다.
이것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녀를 진실로부터 격리하고
‘아버지 없는 고아’로 만드는 가장 이기적이고 무서운 사랑입니다.
성경에도 이 ‘고델’과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이 등장합니다.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이 바로 그입니다(루카 15,25-32 참조).
동생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기쁨에 겨워 잔치를 벌이지만, 큰아들은 분노하며 잔치에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가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무섭게 경고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너희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 23,13)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인정받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전혀 다른 마음을 만나봅시다.
소설 ‘작은 아씨들(Little Women)’에 나오는 네 자매의 어머니, ‘마미(Marmee)’입니다. 아버지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마미는 자녀들의 마음속에 ‘아버지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편지를 딸들에게 읽어주며 그의 사랑과 가르침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딸들이 선행을 베풀 때,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고 격려하며 모든 행동의 기준을 아버지의 마음에 둡니다.
그녀의 가장 큰 기쁨은 딸들이 아버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아버지의 마음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 ‘마미’의 마음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성심의 모상입니다.
성경에서 이 마음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수많은 군중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지만,
결코 그 영광을 차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오직 예수님만을 가리켰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가는 군중을 보며 시기하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망하여야 한다.”(요한 3,29-30) 그는 신랑이신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함께 느끼며, 그 기쁨에 동참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는 위대한 ‘다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다리’의 완성이십니다. 그분은 공생활 내내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으셨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찾기 때문이다.”(요한 5,30),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이 모든 말씀은 우리를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끌려는 간절한 외침입니다.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의 신앙생활은, 나의 봉사는 과연 ‘라푼젤’의 마녀를 닮았습니까, 아니면 ‘작은 아씨들’의 마미를 닮았습니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듯하지만, 결국 사람들이 하느님 아버지가 아니라 나 자신을 더 의지하고 좋아하게 만들려는 이기적인 마음은 없었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 곧 ‘마미’와 ‘세례자 요한’과 같은 마음을 주시고자 합니다.
내가 죽고 나보다 높은 이의 마음을 자녀들이 가지게 하려는 노력입니다.
우리 본당의 냉담 교우 한 사람이 다시 성사 생활을 시작할 때, 죄의 길에서 방황하던 한 영혼이 고해소 문을 두드릴 때, 바로 그때가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순간이며, 우리 또한 예수님의 마음으로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하고 외쳐야 할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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