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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07-02 조회수 : 108

마태오 8,28-34 
 
감사일기를 쓰는 이들이 심판을 이기게 되는 이유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얼마 전 제게 한 형제님이 찾아오셨습니다.
50년 동안 신앙을 멀리하고 지내셨는데,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그 긴 세월 만에 처음으로 고해소에 오신 분이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죄를 고백하신 그분은, 성사를 마친 뒤 제게 조심스럽게 물으셨습니다. 
 
“신부님,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저는 평생 이해가 안 됐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이 정말 계시다면, 왜 이 세상에는 이토록 끔찍한 고통과 악이 존재하는 겁니까?” 
 
이 질문 안에는 커다란 상처가 담겨 있었습니다. 세상의 고통과 악의 존재가 마치 하느님이 계시지 않거나, 혹은 계시더라도 우리가 믿는 것처럼 선하고 자비로운 분은 아닐 것이라는 깊은 원망이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 질문은 바로 오늘 우리가 복음 안에서 마주하는 근본적인 신비, 곧 ‘하느님의 친절하심이 어떻게 인간의 본색을 드러내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사람 둘을 만나십니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서 아무도 그 길을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치유하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마귀들이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저희를 내쫓으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마태 8,3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가라.” (마태 8,32) 하고 허락하십니다. 
 
자, 이 지점을 깊이 묵상해 봅시다.
예수님의 이 자비로운 행위는 가다라 지방에 두 가지 현실을 동시에 가져왔습니다.
하나는 눈부신 ‘선(善)’입니다.
마귀 들렸던 이들이 온전해졌고, 이제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 없이 그 길을 안전하게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끔찍한 ‘악(惡)’입니다.
마을의 소중한 재산인 돼지 이천 마리가 몰살당하는 경제적 파탄을 맞았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이처럼 사람의 생명과 안전이라는 ‘선’과, 돼지 떼라는 재물의 상실이라는 ‘악’을 동시에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피할 수 없는 선택지 앞에서 가다라 사람들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구원의 기쁨보다 당장의 물질적 손해에 더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목소리로 예수님께 “저희 지방을 떠나 주십시오.” (마태 8,34) 하고 애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선과 악을 함께 제시할 때, 우리가 무엇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지, 무엇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본질이 결정됩니다. 
 
이 신비는 인류의 시작부터 함께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에덴동산에 뱀이 들어오도록 허락하셨을까요?
그 전에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와에게 주어진 것은 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곁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었고, 에덴동산의 모든 행복이 있었으며, 사랑하는 아담이 함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충만한 ‘선’과 함께, 뱀으로 상징되는 ‘악’의 가능성을 함께 두셨습니다.
이는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선택의 자유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선을 누리며 그분께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뱀의 유혹에 넘어가 그 모든 것을 잃을 것인가.
그 선택의 기로에 인간을 세우신 것입니다. 
 
구약의 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사탄에게 “좋다, 그의 소유물은 모두 네 손에 넘겨주겠다.” (욥 1,12) 하시며 시험을 허락하셨을 때, 욥은 모든 것을 잃는 재앙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재앙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 안에는 그동안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던
모든 좋았던 날들에 대한 기억과 감사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는 그 모든 고통 속에서도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시옵소서.” (욥 1,21) 하며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선택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은 하느님의 자비가 베푸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보며, 우리가 뱀의 본성, 곧 세상 것에 집착하는 옛 본성을 버리고 새로운 본성을 선택하도록 주어진 기회의 장입니다. 
 
여기에 한 늙은 시계공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회중시계를 목숨처럼 아꼈습니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가게에 들어와 그 시계를 훔쳐 달아나다 곧바로 경찰에게 붙잡혔습니다. 경찰은 시계공에게 이 젊은이를 고소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시계공은 절망과 분노에 찬 젊은이의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경찰에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오해가 있었습니다.
이 시계는 제가 이 젊은이에게 팔기로 한 것입니다."
시계공의 자비는 젊은이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주었습니다.
하나는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는 ‘자유’라는 선물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의 양심을 뒤흔드는 ‘부끄러움’이라는 짐입니다. 
 
이제 이 선물과 짐을 동시에 짊어진 젊은이는, 과연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선택하게 될까요?
시계공의 친절은 젊은이의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시험이자, 그의 본질을 드러낼 기회가 되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주교가 은식기를 훔친 장발장에게 "내가 준 촛대는 왜 가져가지 않았소?"라며 더 큰 자비를 베푸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 자비는 장발장에게 정직한 인간으로 살 기회라는 ‘선’과, 그 은혜에 평생 빚진 자로 살아야 하는 ‘무게’를 함께 주었습니다.
그가 위대한 인간이 된 것은 그 무게를 외면하지 않고 평생 짊어지고 갔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가다라 사람들과 욥 사이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의 기쁨과 안전이라는 선물은 당연하게 여기고, 내게 닥친 손해와 아픔만 바라보며 교만으로 하느님을 떠나는 가다라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내 삶에 주어진 기쁨과 슬픔, 선물과 시련 모두를 끌어안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신뢰하며 믿음의 시험을 통과하려는 욥이 될 것인가? 
 
어느 시골 마을에 물지게꾼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두 개의 항아리에 물을 길어 날랐는데, 그중 하나는 금이 간 항아리였습니다.
금이 간 항아리는 늘 주인에게 미안해했습니다.
“주인님, 제 탓에 물이 새어 늘 절반의 수고밖에 갚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자 주인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길가를 보아라. 네가 물을 흘리는 그 길가에만 예쁜 꽃들이 피어나지 않더냐?
나는 너의 그 흠을 알았기에 그곳에 꽃씨를 심었고, 너는 매일 그 꽃들에게 물을 주었던 것이다.”  
 
자비로운 분이 하시는 일은 꼭 나쁜 것만 남기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것도 반드시 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찾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 노력해야 심판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사일기를 매일 써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악과 고통이라고 여기는 ‘금 간 틈’이, 어쩌면 하느님께서 이 땅에 생명의 꽃이라는 ‘선’을 피우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자비의 통로일지 모릅니다.
우리 삶에 주어진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를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택의 기회요 선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기꺼이 주님을 선택하는 한 주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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