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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07-03 조회수 : 41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요한 20,24-29 
 
믿음은 희망으로 버틸 때 비로소 열매 맺는다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토마스 사도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토마스 사도를 '의심 많은 토마스'라고 부릅니다.
다른 사도들이 모두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 하고 증언했을 때, 그는 차갑게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하지만 오늘 우리는 토마스 사도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합니다.
그의 이 말이 과연 불신앙의 언어였을까요? 어쩌면 이것은 믿음을 포기한 자의 냉소가 아니라, 너무나도 간절히 믿고 싶었기에 터져 나온 한 인간의 정직한 절규가 아니었을까요? 
 
그는 다른 이들의 체험이 아닌, '나의 주님'을 직접 만나고 싶은 거룩한 갈망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의심 속에서 공동체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조건을 외치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 자리에서 끈질기게 '버텼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처럼, 믿음이란 어쩌면 믿고 싶은 것을 위해 끈질기게 원하며 버티는 이의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삶이란, 내가 진정으로 믿고 싶은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나의 온 생애를 통해 그것이 옳았음을 끈질기게 증명해내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이 주제를 잘 보여주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하늘을 향한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20세기가 막 시작될 무렵, 세상의 모든 똑똑한 사람들은 "인간이 기계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작은 자전거포 주인이었던 라이트 형제는 다른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은 반드시 하늘을 날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허무맹랑한 신념을 가졌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막연한 꿈이 아니었습니다.
그 신념을 '증명'하기 위한 끈질긴 버팀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들은 수년간 바람 부는 허허벌판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새들이 나는 모습을 관찰하고, 수백 번의 실패를 거듭하며 글라이더를 만들고, 직접 목숨을 걸고 실험에 나섰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비웃었지만, 그들은 바람과 모래, 끝없는 실패와 싸우며 버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비행에 필요한 세 가지 요소, 즉 양력, 추진력, 그리고
가장 중요했던 '제어'의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갔습니다. 
 
마침내 1903년 12월 17일, 인류 최초의 동력 비행은 고작 12초 동안 36미터를 나는 데 그쳤습니다.
아주 보잘것 없는 비행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12초는 라이트 형제가 평생을 바쳐 믿고 싶었던 것이 진실이었음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 12초의 증거를 얻기 위해 수천 번의 실패를
버텨냈던 것입니다.
그들의 끈질긴 믿음은 마침내 인류 전체의 현실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절망의 한가운데서 붙들었던 의미에 대한 믿음입니다.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은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로고테라피 이론을 정립하고
그 원고를 목숨처럼 아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 모든 것을 빼앗깁니다.
그토록 소중했던 원고마저도 말입니다. 
 
모든 것이 재가 되어버린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그는 무너지는 대신 오히려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기로 결심합니다.
"만약 내 이론이 진정으로 옳다면, 이 지옥의 한가운데서도 의미를 찾는 사람은 살아남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것을 증명하겠다." 
 
그는 수용소를 자신의 신념을 증명할 거대한 연구실로 삼았습니다.
그는 동료 수감자들이 살아남는 이유가 육체의 강인함이 아니라, '살아서 만나야 할 가족', '완성해야 할 과업' 같은 아주 작은 '살아갈 이유'에 있음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이 생생한 증거들을 몰래 기록하며 버텼습니다. 
 
전쟁 후, 그는 자신의 온 삶으로 증명해낸 그 기록들을 모아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그의 삶은,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을 끝까지 버텨낼 때, 그 삶 자체가 가장 위대한 증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라이트 형제와 빅터 프랭클의 이 두 이야기는 세상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우리 신앙의 여정을 놀랍도록 닮아있습니다.
라이트 형제가 불가능해 보이는 '새로운 현실'을
믿었듯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믿습니다.
빅터 프랭클이 절망 속에서 '의미'를 믿었듯이, 우리는 고통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토마스 사도가 바로 그 믿음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 채 일주일을 보내야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기쁨에 동참할 수 없었던 그 일주일이 그에게는 얼마나 길고 어두운 시간이었겠습니까?
그의 외침은 바로 라이트 형제가 하늘을 보며 "날 수 있다!"고 외친 갈망이었고, 빅터 프랭클이 수용소에서 "의미가 있다!"고 외친 절규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그 정직하고 끈질긴 갈망에 응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문을 잠그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시어, 다른 이가 아닌 바로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주님께서는 그의 조건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가 원했던 바로 그 방식으로 당신을 만나주셨습니다.
이 인격적인 만남 앞에서, 토마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앙 고백을 바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이러한 '끈질긴 믿음'의 사례는 성경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가나안 여인은 딸을 살리기 위해 "자식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는 예수님의 매정한 말씀에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하고 버텼을 때, 예수님께서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마태 15,28) 하고 감탄하셨습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며 "축복해 주지 않으시면 보내 드리지 않겠습니다."
(창세 32,27)라고 버텨 마침내 축복을 받아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심이 들 때 공동체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토마스처럼 공동체 안에 머물며, 나만의 조건이라도 외치며 버티는 것입니다.
"주님, 제 삶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주님, 당신께서 제 곁에 계시다는 것을 제발 느끼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
이렇게 정직하게 부르짖으며 버틸 때, 문을 잠그고 들어오셨던 주님께서는 바로 나에게 찾아오시어, 내가 가장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당신의 못 자국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믿음은 완성된 선물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끈질긴 희망과 버팀으로 열매 맺어야 할 우리 삶의 과업입니다.
저는 『하.사.시.』 와 ‘7기도’와 같은 것들이 진리임을 믿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증거들로 열매 맺고 지금은 더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각자가 믿고 싶은 것이 열매 맺기를 희망하며,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그날까지, 믿음의 경주를 멈추지 않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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