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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07-08 조회수 : 81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마태오 9,32-38 
 
사탄의 힘을 이기는 유일한 무기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군중은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일이 일찍이 나타난 적이 없다.”라며 경탄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저자는 마귀들의 우두머리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비난합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사탄은 능력을 가질 수 없다.”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까지 유혹할 수 있다면 그것은 능력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고, ‘사탄의 힘을 빌려 예언이나 주술적 능력을 발휘하는 무당과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능력이 아닌가?’라고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파괴하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세상은 파괴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허물어지고 늙고 병들고 죽게 만듭니다.
반대로 세우는 게 능력입니다.
새롭게 짓고 사람을 치유하고 살리는 것이 능력입니다.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모기가 피를 빠는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기는 했지만, 모기에게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의 비판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고장난 부분을 고쳐주거나 살리시는 기적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말 못하는 이를 말하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질문이 우리에게 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처럼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받을 수 있는가?’입니다.  
 
1980년 5월, 서울의 택시기사 김만섭(영화 속 이름, 실존인물 김사복)은 그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가장이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밀린 월세를 내고 어린 딸을 잘 키우는 것이었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거창한 신념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광주행을 결심한 것도, 통금 전에 돌아오면 10만 원이라는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시위하는 대학생들을 보면 ‘공부나 할 것이지’ 혀를 차던,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이었습니다. 
 
광주에 들어선 그의 눈에 비친 광경은 처음엔 그저 ‘혼란’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손님인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목적지에 데려다주고, 약속한 돈을 받아 서울로 돌아가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에, 그의 마음에, 광주의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도 먹을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기자와 그에게 주먹밥을 건네던 시민들, 부상당한 친구를 업고 절규하던 대학생, 그리고 무엇보다 동료 택시 기사들이 목숨을 걸고 부상자들을 실어 나르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마음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아픔은 곧 그의 아픔이 되었고, 그들의 절규는 그의 절규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연민의 마음’이 싹튼 순간, 돈 10만 원이 세상의 전부였던 소시민 김만섭은 사라졌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이 진실을 반드시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한 인간이 서 있었습니다.
그 연민은 이전에는 결코 가져본 적 없는 ‘용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군인들의 총구가 자신을 겨누는 상황에서도 그는 기자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위험한 길을 피해 돌아갈 ‘지혜’가 생겼고, 자신의 생계 수단인 택시가 부서지는 것을 감수할
‘희생정신’이 생겨났습니다.
그의 택시는 더 이상 돈벌이 수단이 아닌, 진실을 싣고 역사를 가로지르는 ‘기적의 방주’가 되었습니다.
김사복 씨의 이야기는 증명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인 ‘연민’이 우리 안에 자리 잡을 때, 우리 역시 상상도 못 했던 용기와 지혜를 선물로 받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는 소위 ‘돈쭐’과 연결됩니다. 돈으로 혼내준다는 뜻입니다.
이런 가게 대부분은 자비를 베푼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능력이 전달되고 그 능력으로 다른 이들을
더 돕습니다.
이런 일이 선순환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자신들을 두려움으로 죄짓고 파괴하려는 사탄의 유혹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탄을 이기는 힘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버려진 모습에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마태 9,36)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 연민의 마음,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사랑의 마음이 하느님 능력의 원천입니다.
능력은 마음 다음에 옵니다.
마음이 능력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렇다면 이 거룩한 마음, 이 연민은 어떻게 우리 안에서 자라날 수 있을까요?
꽃을 키워본 사람은 모든 꽃을 사랑합니다. 자녀를 키워본 어머니는 다른 자녀들에 대한 연민도 가지게 됩니다.
연민은 바로 내가 작은 목자가 되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 새로 탄생시키는 일을 할 때
길러집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법이 주어진 것입니다.
먼저 농사의 일을 해 보아야 곡식의 소중함을 압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거둬들이지 않아 말라가고 썩어가는 곡식으로 보일 때 연민의 마음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모세가 처음 이집트에서 동족의 고통에 반응했을 때, 그의 손에는 기적의 지팡이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이집트 왕자로서의 혈기와 분노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는 동족을 괴롭히는 이집트인을 보고 의분에 차 주먹을 날렸지만, 그 결과는 동족의 외면과 미디안 광야로의 도피였습니다.
그 후 40년, 광야에서의 세월은 모세에게 ‘연민의 마음’을 훈련시키는 하느님의 시간이었습니다.
양들이 쉴 만한 풀밭과 마실 물을 찾아 광야를 헤맸고, 맹수들로부터 양들을 지키며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렇게 그의 마음이 준비되었을 때, 마침내 하느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당신 스스로를 “내 백성의 고통을 똑똑히 보았고,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출애굽 3,7)라고 소개하시며, 당신의 ‘목자 된 마음’을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과 같은 마음을 품게 된 모세에게, 비로소 세상을 구원할 ‘힘’, 곧 기적의 지팡이를 맡기셨습니다.  
 
사탄이 능력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단 한 사람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해본 적이 없기에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 없고, 마음이 능력을 담는 그릇이기에 능력이 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능력이 없다고 먼저 말하지 말고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는 종종 ‘힘이 없어서, 가진 게 없어서, 능력이 부족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과 두 예화는 우리에게 순서가 틀렸다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능력을 기다리지 말고, 먼저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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