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간 월요일]
마태오 12,38-42
말씀으로 이끌지 못하는 은총은 가짜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에게서 표징을 하나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악하고 불충한 세대”라고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이것은 마치 사춘기 아이가 부모에게 ‘잔소리 그만하고 밥이나 차리세요!’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습니다.
은총은 받되 말씀은 물리치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신앙을 ‘표징중독’이라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성체 조배를 하면서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물고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기보다, ‘뭔가 신비한 것을 보거나, 특별한 느낌을 받는 것’에 집착합니다.
심지어 생명의 말씀인 성경마저도 표징으로 취급합니다.
무작위로 성경을 펼쳐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지금 나에게 주시는 직접적인 명령이라 믿는 ‘성경 점’을 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묵상을 통해 나에게 소화되고 삶으로 체화되어야 하는 양식이지, 즉석에서 답을 알려주는 운세 쪽지가 아닙니다.
표징중독의 위험성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나중엔 부모까지도 해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90년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박한상 씨의 사례를 기억하실 겁니다.
그는 부모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을 상속자였지만, 자신을 통제하려는 부모의 ‘잔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부모를 살해하는 끔찍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부모가 주는 돈(은총)은 원했지만, 그 돈에 담긴 책임과 의무의 가르침(말씀)은 거부한 결과였습니다.
이와 유사한 비극은 미국에서도 있었습니다. 1989년, 라일과 에릭 메넨데즈 형제는 베벌리힐스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부모를 총으로 살해했습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덕에 그야말로 왕자처럼
살았습니다.
최고급 스포츠카, 명품 시계,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습니다.
부모가 제공하는 물질적 풍요(은총)를 마음껏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방탕한 생활을 꾸짖고
올바른 길로 이끌려는 부모의 간섭(말씀)을 증오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부모를 제거하고 1,400만 달러의 유산을 차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달콤한 돈과 사치는 마음껏 집어삼켰지만, 쓴소리와 가르침은 철저히 뱉어냈고, 그 결과는 파멸뿐이었습니다.
인간이 부모로부터 오는 은총과 표징만을 원하고 말씀은 원하지 않을 때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자녀가 되어야 할까요?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 마의 아버지, 마효준 박사(Dr. Hiao-Tsiun Ma)는 네 살짜리 아들에게
첼로를 가르칠 때,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중 단 ‘두 마디’만 주고는, 그것을 완벽하게 익힐 때까지 다른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요요 마에게 아버지는 값비싼 첼로(은총)를 사주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첼로의 대가로 나아가는 길(말씀)을 한 걸음씩 안내하는 스승이었습니다.
오늘의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표징에 대한 갈망 이전에,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에 먼저 관심을 두게 될 수 있을까요? 흥미롭게도, 한때 표징 중독자였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그 답을 보여줍니다.
쾌락과 이단 사상이라는 표징을 찾아 헤매던 그가 회심하던 순간, 그는 “집어 들고 읽어라(Tolle, lege)!”라는 아이의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이것은 분명 ‘표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표징이 가리킨 것은 또 다른 신비 체험이 아니었습니다.
그 표징은 그를 곧장 ‘성경을 읽는 행위’로, 곧 ‘말씀’으로 이끌었습니다.
진정한 표징은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합니다.
표징 자체가 목적이 될 때, 신앙은 길을 잃습니다.
어려서부터 이러한 균형 잡힌 신앙 교육을 받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피카소나 요요 마가 아버지의 가르침을 신뢰하며 따랐던 것처럼, 우리도 교회라는 어머니의 가르침, 즉 체계적인 교리와 성경 공부의 과정을 신뢰하고 따라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말씀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아우구스티노 성인처럼, 주님의 표징이 우리를
결국 ‘성경을 읽는 행위’로 이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피카소와 요요 마처럼, 지루해 보이는 기초와 과정 안에 위대한 은총이 숨겨져 있음을 신뢰해야 합니다.
제가 성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안수를 받고 가장 후회한 것은, 그분께서 안수하신 후에 저에게
한마디 하신 것을 못 알아들었고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물어보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안수는 은총인데, 그 은총은 말씀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더 이상 달콤한 것만 골라 먹는 뷔페가 아니라, 우리 영혼을 온전히 살리는 거룩한 코스요리가 되도록 결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자판기’ 신앙을 넘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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