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간 월요일
언젠가 저녁에 어떤 모임에서 누군가에 대한 험담을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임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끝기도를 하는데 제 모습이 후회되고 부끄러웠습니다. 험담했다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때 험담하면서 속이 다 시원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일 재미있어하는 말이 험담, 뒷담화라고 하는가 봅니다. 하지만 험담은 전혀 좋지 않습니다. 나에게도 또 그 험담의 대상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사실 험담의 이유를 잘 따져 보면 ‘나는 괜찮다’라는 생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괜찮은 자기 기준에 맞지 않음에 상대를 뒷담화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부족함을 가리기 위해 상대의 문제점을 부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상대보다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그래서 상대를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받아들이면 절대 험담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응원하고 칭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어린아이를 향해 뒷담화하는 부모를 본 적이 없습니다. 다 똑같아 보이는데도 자기 자녀가 더 특별하다고 바라보지 않습니까?
뒷담화, 험담은 자기를 부끄럽고 힘들게 합니다. 이를 지우는 방법은 딱 한 가지입니다. 상대를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자기의 발전과 성숙은 필수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마태 12,38)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이제까지 수많은 기적을 보았고 또 기적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 신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거나 무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마태 12,39)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예수님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으며, 자기들처럼 올바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과만 어울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험담만을 늘어놓던 그들은 표징만을 요구하면서 자기들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시지요. 니네베 사람들이 그리고 남방 여왕이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는 세대는 단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뒷담화, 험담을 하기에 앞서서 먼저 회개하고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의 표징들을 삶 안에서 계속해서 발견하면서 굳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너무 소심하고 까다롭게 자신의 행동을 고민하지 말라. 모든 인생은 실험이다. 더 많이 실험할수록 더 나아진다(랄프 왈도 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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