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주보

수원주보

Home

게시판 > 보기

오늘의 묵상

7월 2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07-29 조회수 : 153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요한 11,19-27 
 
하느님은 당신 ‘소원’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여러분, 오늘 조금은 도발적인 말씀으로 시작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의 ‘소원 리스트’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십니다.
“신부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매일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데요?” 라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런 경험 없으십니까?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눌렀는데 음료수가 안 나오면, 우리는 자판기를 발로 툭툭 차며 “이거 고장 났네!”라고 소리칩니다.  
 
솔직히 우리가 기도를 그렇게 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건강’ 버튼, ‘합격’ 버튼, ‘돈’ 버튼을 절박하게
누르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대체 제 기도를 듣고는 계신 건가요?”라며 하느님이라는
자판기를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왜 기도해도 바뀌는 게 없을까?’라는 탄식은 바로 이 오해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알라딘의 램프 속 지니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을 믿고, 어떤 ‘싸움’을 시작하는지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세상에도 이런 원리를 보여주는 놀라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헬렌 켈러’와 그녀의 스승 ‘앤 설리번’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헬렌 켈러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의 어둠, 그야말로 ‘영혼의 무덤’ 속에 갇힌 아이였습니다.
가족조차 포기했던 이 아이에게 스승 앤 설리번이 찾아옵니다.
앤 설리번이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녀는 헬렌을 위해 “보게 해주세요, 듣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대신 빌어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헬렌의 손을 잡고 펌프가로 데려가 차가운 물을 느끼게 하면서, 그 손바닥에 ‘w-a-t-e-r’라는 단어를 수없이 써 내려가는, 지독하고 고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어둠 속에 갇힌 영혼이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단 하나의 통로, 그 작은 돌멩이 하나를 함께 치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침내 헬렌이 펌프가에서 물의 실체와 단어를 온몸으로 깨닫는 순간, 그녀의 무덤 문이 열리고 기적이 시작되었습니다.
앤 설리번은 헬렌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헬렌이 스스로 세상과 연결될 수 있도록, 가장 단단한 불신의 돌, ‘나는 불가능하다’라는 돌을 함께 치워준 것입니다.
하느님도 우리 소원을 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 소원을 위해 움직일 의지가 있는지만 관심이 있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라자로의 무덤 앞에 서십니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절망의 현장입니다.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마르타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 11,21)
이 고백은 훌륭해 보이지만, 사실 여기에는 교묘한 불신이 숨어있습니다. 
 
‘과거에’ 계셨더라면 살리셨을 것이고, ‘미래에’ 부활하리라는 것은 믿지만, ‘지금 여기’ 이 절망의 현장에서 무언가 하실 수 있다는 것은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내가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선포하신 뒤, 사람들을 향해 전능하신 명령을 내리십니다.
“저 돌을 치워라.” (요한 11,39) 
 
예수님은 손가락 하나로 돌을 날려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절망하고 있는 우리에게 먼저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냄새나고, 힘들고,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그 일,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불신의 돌’을 우리 손으로 직접 치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지극히 현실적인 마르타가 가로막습니다.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이것이 바로 ‘이게 되겠어?’라고 말하는 우리 안의 목소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믿으라고 하시며, 사람들이 마침내 돌을 옮기자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하고 외치시어 죽음을 이기십니다. 기적은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신 사건만이 아닙니다.
진짜 기적은, 사람들이 절망 속에서도 ‘말씀에 순종하여 돌을 옮긴’ 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한 주, ‘소원’을 비는 기도를 잠시 멈추고 ‘싸움’을 거는 기도를 시작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의 소원보다는 ‘그래서 뭐를 했는데?’에 더 관심이 있으십니다.
‘이건 절대 안 될 거야’라고 단정 지었던 내 삶의 무덤을 딱 하나 정하십시오.
그리고 그 무덤의 돌멩이를 옮기는 아주 작은 행동 하나를, 주님께 대한 순종의 기도로 봉헌해보십시오.
용서할 수 없던 그 사람의 SNS에 ‘좋아요’ 한번 누르는 것이 바로 돌을 옮기는 것입니다.
엄두가 안 나던 자격증 시험의 원서 접수 버튼을 누르는 것이 돌을 옮기는 것입니다. 
 
‘나는 기도할 자격도 없어’라는 생각과 싸우며 1분이라도 성경을 펼치는 것이 돌을 옮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돌멩이와 씨름을 시작할 때, 하느님은 여러분의 소원보다 훨씬 더 위대한 당신의 ‘관심’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바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당신의 권능입니다. 아멘.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