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율법 학자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 13장의 핵심 주제인 하늘 나라에 관한 마지막 비유와 함께 모든 비유를 끝맺는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물 비유에서, 앞서 다른 비유에서처럼, 하느님은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보시고 아실 뿐입니다. 격리 또는 구별은 하느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좋은 결실과 가라지 비유에서, 이 둘 사이의 구별은 집주인이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확인된 상태였습니다. 오늘 비유에서도, 그물에 가득 찬 온갖 종류의 물고기 가운데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은 이미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판단에 따라,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이 나뉜 것은 아닙니다. 이미 그렇게 평가되었고, 그렇게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그물 비유의 마지막 부분 곧 세상 종말에 관한 언급에서도, 의인들로부터 가려내진 악인들은 하느님의 단죄 결과가 아닙니다. 사람이 하느님이 주신 최대의 선물인 자유 의지에 따라 살아 온 결과입니다. 물신의 노예가 되어 살아온 결과입니다. 따라서 모든 책임은 사람에게, 전적으로 사람에게 있습니다.
부연하자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하는 표현 속에서, 단죄와 응벌보다는 다가올 현실 경고에 무게가 실려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하실”(루카 15,7) 분이기 때문입니다.
비유 말씀을 마치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이것들을 깨달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다소의 혼란스러움을 줄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았다면, 왜 깨달은 대로 행동하지 않는지, 깨닫지 못했다면,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을 왜 말하지 않았는지 하는 질문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깨닫는 일입니다. 우리의 행동과 자세를 정당화하거나 단죄하는 일이 바로 깨달음의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의 힘찬 대답 “예!”는 그들을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 학자로 끌어올리는 대답입니다. 이 새 율법 학자들은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문맥상, 옛것이란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역사를 지배했던 주된 주제인 하느님 나라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새것이란 예수님의 오심과 그분의 가르침으로 완성된 하느님 나라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개념은 동일하지만, 하나는 시작과 펼침의 단계에 있는 나라라면(구약성경), 다른 하나는 완성 단계의 나라를 말합니다(신약성경). 이처럼 하느님 나라에 관한 전승은 늘 살아 있는 전승이지만, 진정한 새로움에 이를 수 있는 깊이 있는 깨달음을 통해서, 나아가 보다 완벽한 실현을 통해서 계승되어야 하는 전승을 말합니다.
어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계신 나라로 쉽고 간략하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하느님이 계시면, 그 마음이 바로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내 마음이 늘 하느님을 모실 수 있도록, 그리하여 여기서 이미 좋은 것들로 평가되고 의인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다시금 우리 마음에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삶을 다짐하고 실천하는 하루, 밖으로 던져짐으로써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서는 안 되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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