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에 대한 새로운 시선
어제까지 우리는 마태 13장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 말씀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어제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하는 언급으로 끝맺음하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하는 언급으로 열립니다. 이 두 언급으로 미루어, 복음서 본문의 전개 과정에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듦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에 따라 그 범위를 조금씩 달리하고 있지만, 대다수의 경우 16장 20절까지를, 곧 ‘수난과 부활에 관한 1차 예고’ 직전까지를 새로운 단계로 봅니다.
오늘 예수님은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십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그렇게 해오셨듯이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신통치 않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하고 놀라운 마음으로 자문하면서도,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라고 합니다. 왜 못마땅하게 여겼을까요? 가르치심에 지혜가 묻어나고 행동하심에 기적의 힘을 인정하면서도 말입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반응입니다. 오히려 우리 마을 출신 가운데 한 사람이, 소문을 통해 들었던 대로, 그렇게 유명한 인사가 되어 우리 앞에 서서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고 자랑함이 당연한 모습이어야 할 텐데도 말입니다.
사제생활 가운데 대부분을 신학교에서 사제양성을 위해 봉사해온 터에, 다음과 같은 경험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새내기로 신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사제로 서품되기까지 함께 해오면서, 사목자로서 갖추어야 할 인격 형성과 영적 성장과 지적 수준 향상을 위해 도움을 주면서, 가끔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알던 신학생들이 훗날 보좌신부로 그리고 본당신부로 사목활동을 하면서, 유명 인사(?)로 평가되는 경우였습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내가 알던 신학교에서의 그 신학생과 본당 또는 특수사목 현장에서의 동일한 그 사제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일 때였습니다.
신학생 때는 ‘아니었었는데….’ 하는 경우입니다. 못마땅하게 생각한 적은 없어도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맞닥뜨릴 때마다, 두 가지 점에서 생각을 고쳐잡았습니다. 내가 신학생 때의 그 사제를 제대로 알지 못했었다고 하는 반성과 함께, 사제로 살아가면서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지적으로 얼마나 더 노력했을까 하는 지점입니다. 결과적으로, 그 신부가 수원대신학교 출신임에 오히려 감사드리고, 축하의 마음과 함께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성원했던 기억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사제양성자로 함께 일했던 모든 지도신부도 같은 생각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있다고 판단해온 그 예수님과, 소문으로 들은 예수님, 그리고 지금 앞에 서서 권위와 지혜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면서, 결국 부정적 판단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며, 되풀이해서는 안 되는 현실입니다.
오늘 하루, 특별히 오래전부터 가까이해온 사람들, 가족들을 비롯한 이웃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들에게서 좋은 점들을 찾아 인정하고 본받겠다는 다짐으로 더 좋은 인간관계를 쌓아나가는, 복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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