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8주일]
루카 12,13-21
바닥을 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우리는 이미 망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인류의 가장 끔찍한 고통을 끝내기 위한 발명이, 어째서 발명가들에게는 지옥의 시작이 되었을까요?
이 비극은 1846년 10월 16일, 미국 보스턴의 한 병원에서 시작됩니다.
그날 인류는 처음으로 에테르 마취를 이용한 공개 수술에 성공하며 환호했지만, 그 영광의 무대 뒤편에서는 세 남자의 인생이 파멸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치과의사 웰스, 그의 제자 모턴, 그리고 또 다른 스승 잭슨. 이 세 사람은 서로가 마취술의 최초
발명가라고 주장하며, 탐욕이라는 광기가 빚어낸 지옥도를 펼쳤습니다.
서로를 비방하고, 소송을 걸고, 명예를 짓밟았습니다.
그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웰스는 사람들의 비난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모턴은 특허 소송에 모든 것을 탕진한 채
길거리에서 비참하게 죽었으며, 잭슨은 두 사람의 비극을 지켜보다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인류를 고통에서 구원할 기술이, 정작 당사자들은 가장 끔찍한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이것이 탐욕의 맨얼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남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유산을 나눠달라고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 왜 “너희는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하고 얼굴을 굳히며 말씀하셨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한마디 말속에 숨겨진, 저 세 사람의 비극으로 향하는 길을 똑똑히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탐욕의 길이 아닌,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요? 제가 아이에게 맛있는 과자를 한 봉지 사 주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제가 “아빠도 하나만 먹어보자” 하니 아이가 싫다고 고개를 젓습니다.
“그럼 동생이랑 하나씩 나눠 먹으렴” 하니, 그것도 싫다고 자기 품에 꼭 껴안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다음에 또 과자를 사 주고 싶을까요? 저라도 삐져서 다음엔 국물도 없을 겁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 재능, 재물을 자기 것인 양 꼭 껴안고 나누지 않는다면, 그분께서 주시는 더 큰 은총의 선물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색한 사람은, 결국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스타 강사 김미경 씨가 방송 ‘어쩌다 어른’에 나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강사였던 그녀는, 석사 논문 표절 사건이 터지면서 하루아침에 모든 강의가 끊기고 완전히 망하는 경험을 합니다.
그녀는 그 끝없는 절망 속에서, 자신의 삶이 오직 사람들의 인정과 박수만을 갈구하는 ‘자아의 노예’로 살아온 삶이었음을 처절하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진 그 침묵 속에서, 자기 안에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진짜 자신의 목소리, 어쩌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람은 망해야 한다’고요.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꼭 그렇게 인생의 급소를 맞고 쓰러져야만, 비로소 탐욕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걸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망해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직접 망해보는 길을 택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원죄로 인해 이미 에덴 밖, 즉 ‘영적 파산 상태’에서 삶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하느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에 대한 데이터가 이미
내장되어 있습니다.
굳이 새로 망할 필요 없이, 과거의 경험을 잘 살펴보면 됩니다.
저의 경우를 예로 들면, 어릴 적 문방구에서 지우개를 훔치다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죄책감의 고통을 느낀 기억이 있습니다.
그 기억이 저를 도둑질로부터 지켜줍니다. 또래보다 일찍 담배를 피웠지만, 남의 것을 훔쳐서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에겐 모두 이런 ‘작은 실패’와 ‘양심의 고통’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보물입니다.
그렇다면 이 보물을 사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오늘 복음의 부자처럼, ‘오늘 밤 내가 죽는다’는 생각의 예방주사를 매일 맞는 것입니다.
백신은 소량의 약화된 바이러스를 우리 몸에 주입해서, 진짜 바이러스가 왔을 때 이겨낼 항체를 만들어줍니다.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생각은 우리에게 조금 불편하고 거북한 주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주사는, 탐욕이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우리 영혼이 감염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가장 강력한 백신입니다.
선조 임금은 이 예방주사를 맞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국이 영원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임진왜란이라는 끔찍한 병을 온몸으로 앓아야 했습니다.
수도 한양이 불타고, 백성들이 죽어 나가고, 자신은 비에 젖어 의주로 도망치는, 나라의 ‘죽음’이라는 바닥을 치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이순신이라는 보물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눈물로 애원합니다.
“경이 없으면 나라도 없소.
모든 것이 경에게 달려 있소.” 자신의 권력이라는 창고가 완전히 파산하고 나서야, 그는 신뢰라는 진짜 부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기 전에, 매일 예방주사를 맞을 수 있습니다.
저의 첫 기억은 할머니의 죽음입니다.
어린 마음에 사람이 잠을 자다 그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잠드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혹시나 나도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할까 봐서요.
그런데 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저는 이상한 결심을 했습니다.
‘만약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면, 후회 없이 행복하게 하루를 살자.’ 그렇게 매일 밤 죽음을 생각하며 하루를 살기 시작하자, 역설적이게도 제 삶은 그 어떤 때보다 자유롭고 풍요로워졌습니다.
무언가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오늘 밤이면 다 놓고 가야 할 것들이었으니까요.
교회는 이 위대한 지혜를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바로 성무일도 끝기도에 바치는 기도입니다.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이 기도가 얼마나 엄청난 기도인지 아시겠습니까? 이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기도가 아니라,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달라는 가장 간절한 기도입니다.
내 생명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고백하며, 오늘의 모든 집착을 주님 발아래 내려놓는 가장 완벽한 기도입니다.
이번 주, 우리의 실천 사항은 이것입니다.
매일 밤, 그 작은 죽음인 잠자리에 들기 전, 이 기도를 꼭 한 번씩 바칩시다.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오늘 하루 나를 괴롭혔던 탐욕과 걱정들을 주님께 맡겨드립시다.
그렇게 죽음이라는 백신을 매일 맞을 때, 우리는 어리석은 부자가 아닌, 하느님 앞에서 가장 지혜롭고 부유한 사람으로 매일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시어 저희 마음이 지혜를 얻게 하소서.”(시편 9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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