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루카 9,28ㄴ-36
예수님께서 타볼산에 오를 때 이미 당신이 변하실 것을 아셨을까?
찬미 예수님!
새해 첫날 헬스클럽은 왜 늘 인산인해를 이룰까요?
그리고 한 달 뒤에는 왜 그토록 텅 비어 버리는 걸까요? 우리는 모두 더 나은 내가 되기를 꿈꾸며
‘변화’를 시도하지만, 그 결심이 작심삼일로 끝나고,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있는 자신을 보며
실망하곤 합니다.
왜 포기할까요? 어쩌면 이제 변하는 것보다 편하게 먹고 마시는 것을 더 좋아하기를
선택하였거나, 혹은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일단 돈까지 줬으면 결과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이것을 끝까지 버티면 ‘변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기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변한다’라는 사실을 온전히 믿지 않으면 기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요즘 성당에서는 아이들 신앙학교가 한창입니다.
제가 겪은 일 중에 재미있는 차이가 있습니다. 개신교 신앙학교에 가는 아이들은 ‘오늘 밤 기도회에서 주님을 만날 거야!’, ‘뜨겁게 찬양하다 보면 성령을 체험할 거야!’ 하는 아주 강한 기대를 품고 갑니다.
그리고 정말 밤새 울고 웃으며 기도하면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뜨겁게 체험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 가톨릭 신앙학교는 어떻습니까? 물론 즐겁고 유익하지만, ‘기도해서 내가 변할 수 있다’, ‘기도 중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는 상대적으로 약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안타깝게도, 성당에 열심히 다니던 아이가 친구를 따라 개신교 수련회에 갔다가, 난생처음으로 몇 시간씩 뜨겁게 기도하는 체험을 하고 와서는 “신부님, 하느님은 정말 살아계셨어요!” 하고 고백하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기도를 대하는 근본적인 차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기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올라가셔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실 때, 홀로 계시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나타났습니다.
왜 하필 이 두 사람이었을까요?
이들은 바로 기도를 통해 우리가 변화되는 두 가지 핵심 통로, 즉 ‘은총’과 ‘진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한 예언자입니다. 그는 우리의 이성이나 노력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하늘에서 거저 주어지는 뜨거운 ‘은총’의 불을 상징합니다.
반면에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의 법, 즉 십계명을 받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삶의 기준이 되고 어둠을 밝히는 ‘진리’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변화는 바로 이 두 기둥, 즉 불같은 은총과 빛 같은 진리를 통해 일어납니다.
기도 안에서 만나는 이 두 가지는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나를 변화시키는 핵심 요인들입니다.
먼저, ‘은총’의 불로 변화된 한 남자, 영화 ‘미션’의 주인공 로드리고 멘도사가 있습니다.
그는 동생을 죽인 끔찍한 죄책감에 폐인이 된 채, 자신의 죄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갑옷 뭉치를
밧줄로 묶어 몸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끌고 미끄러운 바위를 기고, 거친 폭포수를 맞으며 절벽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말로 하는 기도가 아닌, 그의 ‘몸으로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그가 변할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그 끔찍한 길을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정상에 올랐을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가 과거에 노예로 잡아들였던 과라니족 원주민 한 명이 다가와, 그의 목에 걸린 무거운 밧줄을 칼로 끊어줍니다.
순간, 갑옷 뭉치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나가고,
멘도사는 어린아이처럼, 혹은 한 마리 짐승처럼 통곡합니다.
바로 이것이 기도 안에서 받는 ‘은총의 불’의 열매입니다.
자신이 가장 상처 주었던 사람의 용서라는, 하늘에서 떨어진 불과 같은 은총을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변모하기 위해 올라간 모습이 예수님께서 기도하기 위해 타볼산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변화는 이런 뜨거운 은총으로만 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여기 또 한 명의 남자가 있습니다.
서양 역사상 가장 명석한 두뇌를 가졌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서는 한 발짝도 빠져나올 수 없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가 절망의 끝에서 울고 있을 때, 어디선가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 하고 외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성경을 펼쳤고, 그의 눈에 들어온 구절은 이것이었습니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로마 13,13-14)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합니다.
그 구절을 다 읽는 순간, 마치 ‘확신의 빛’이 자기 마음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의심의 그림자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말입니다.
그는 ‘대낮’에 행동하듯이, 즉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주님 앞에서 살아가라는 그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 한 문장의 진리가, 칼이 되어 그의 과거를 잘라냈고, 빛이 되어 그의 미래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 말씀으로 바로 바뀌었을까요? 매일 빛 속에서 죄의 어둠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자신과 싸우면서 조금씩 변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복음은 분명히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루카 9,29)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그냥 일어난 신기한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본질을 알려주시기 위해, ‘내가 기도하면 어떻게 변하는지 잘 보아라.
그리고 너희도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라’ 하고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바로 ‘기도란 나를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청하려고 하는 다른 모든 것들은 덤으로 얻어지게 됩니다.
내가 변하지 않아 은총을 청해도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큰 형님은 한때 매일 가위에 눌려 힘들었을 때 자기 전에 성호를 긋고 잤습니다.
그랬더니 기적처럼 가위에 눌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계속 성호를 그었고, 지금은 성당에 아주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열매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하느님을 바꾸거나 이웃을 바꾸거나 환경을 바꾸려 하지 마십시오.
내가 먼저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