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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08-07 조회수 : 150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마태오 16,13-23 
 
사탄이 절대 아멘 할 수 없는 명령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은 한 편의 반전 드라마와도 같습니다.
어떻게 한순간에 주님의 가장 든든한 ‘반석’이, 그분의 길을 가로막는 ‘사탄’으로 추락할 수
있었을까요? 방금 전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위대한 신앙을 고백하여 칭찬받았던 베드로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싸늘하게 돌아서서
벼락같이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베드로가 겪은 이 아찔한 추락은, 어쩌면 우리 역사 속 한 장면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조선의 가장 위대한 왕 세종께서 마침내 훈민정음을 반포했을 때, 가장 가까이서 그를 보필하던 최만리와 같은 집현전의 충신들이 핏대를 세우며 반대 상소를 올립니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어찌 중화를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의 길을 가려 하시나이까!”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그들은 세종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분명히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그들의 마음을 지배한 진짜 임금은 용상에 앉은 세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중화(中華)의 질서', 즉 큰 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거대한 이념 그 자체였습니다. 
 
진짜 주인이 따로 있으니, 눈앞의 주군에게 온전히 순명(順命)하지 못한 것입니다.
백성의 안위가 아닌 자신의 이념을 따르는 이들에게 세종이 신앙이 있었다면 ‘사탄’이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세종을 막아섰던 신하들처럼,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알아보았지만’, 그의 마음을 지배한 진짜 주인은 ‘고통 없이 영광만 얻고 싶은 인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이라는 당신의 길을 말씀하시자,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필사적으로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탄의 본질을 꿰뚫는 하나의 영적 원리를 발견합니다.
사탄이란, 하느님을 알아보면서도 결코 순종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진짜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주인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태초의 하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분명히 알았지만,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될 것”이라는 뱀의 속삭임, 즉 스스로 주인이 되고픈 욕망에 굴복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뱀이 그의 주인이 되었고, 그가 자아내는 생각은 ‘사람의 일’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고, 사람의 일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그렇게 사람의 일은 하느님의 일에 불순종하게 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모든 혼란과 싸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 안에 도사린 다른 주인의 정체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게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세종의 신하들이 ‘사람의 일’인 중화질서를 따랐을 때 임금의 걸림돌이 되었듯, 베드로가 ‘사람의 일’인 안락한 구원만 생각했을 때 주님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싸움은 결국 ‘사람의 일’을 생각할 것인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할 것인가의
싸움입니다.
여기서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번역한 문장은 “내 뒤에 서라!”입니다.
“네가 명령하는 자가 아니야!”란 뜻입니다. 순종하란 뜻입니다. 당신 뜻에 “아멘~!”라는 뜻입니다.  
 
자신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과 하느님의 싸움을 단칼에 끝낸 분이 계십니다.
바로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천사의 말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응답하신 그분의 ‘피앗’, 그분의 ‘아멘’이야말로, ‘사람의 생각’을 완전히 몰아내고 ‘하느님의 일’에 자신을 온전히 투신한 가장 위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사탄은 ‘아멘’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빛을 섬기기 시작하여 빛의 존재가 되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아멘은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입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임금인 선조에게 끊임없이 의심받고, 모함에 빠져 관직을 박탈당하고, 심지어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백의종군(白衣從軍)의 수모를 겪습니다. 인간적인 생각, ‘사람의 일’로만 본다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부당한 명령의 연속이었습니다. 원망과 배신감에 칼을 버려도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의 순명은 무능한 임금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구해야 한다.’라는 자신의 소명, 하늘의 뜻을 향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자존심이라는 ‘사람의 일’을 내려놓고, 고통 속에서도 나라를 구하라는 ‘하늘의 뜻’에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한 임금의 신하를 넘어 하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순종하며 성장합니다.
사람이 되어갑니다. 저도 순명이 참 어려웠습니다.
사제가 되라는 것도 그렇고, 유학가라는 것도 그랬습니다.
한 번 아멘,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신학교 들어가서 그 삶 안에서 행복해지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순명할 때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유학 가서는 첫 6개월은 방황하였습니다.
그래도 순명하려고 하니 빨리 끝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사제도 되었고 신학박사도 되었습니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뜻’에 하는 ‘아멘’은 마법과 같습니다.
그것은 내 삶의 운전대를 나의 옹졸한 ‘사람 생각’에서 전능하신 ‘하느님의 생각’으로 넘겨드리는 영적인 선언입니다.
불평 대신 ‘아멘’을 선택할 때, 우리는 걸림돌이 되는 사탄의 자리에서 물러나, 빛의 자녀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 작은 순명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거룩한 장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언제나 당신의 뜻 앞에서 “아멘”으로 응답하는 당신의 참된 자녀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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