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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08-08 조회수 : 146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마태오 16,24-28 
 
제발 “나는 죄인입니다” 좀 그만했으면….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가장 중심에 있는,
그러나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 하나를 우리 앞에 놓아두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잘 안 죽는 것 같습니다.
고해성사 들어와서, “저는 큰 ~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은 계속 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죄인이라고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죽어야만 합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이지만, 깨닫기까지는 정말 힘이 듭니다.
‘농구 황제’라 불리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마이클 조던. 그의 개인기는 압도적이었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한 플레이로 수많은 득점을 올렸고, 모두가 그를 ‘코트의 왕’이라 불렀습니다. 그의 뜻은 명확했습니다.
‘내 능력으로 경기를 지배하고, 내 손으로 팀을 승리로 이끄는 것.’
그는 늘 자신이 영웅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팀 시카고 불스는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습니다.
왕은 있었지만, 왕조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필 잭슨이라는 감독이 부임하며 ‘트라이앵글 오펜스’라는 팀 전술을 도입합니다.
이 전술의 핵심은 공을 독점하지 않고, 모든 선수가 함께 움직이며 기회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조던은 격렬하게 반발했습니다.
팀의 시스템을 위해 자신의 개인기를 죽이라는 것은, 왕에게 왕관을 내려놓으라는 말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패배 속에서, 그는 마침내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내 방식대로 계속 왕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나를 죽여 팀을 우승시킬 것인가.’ 오랜 갈등 끝에, 그는 마침내 자신의 고집을 꺾습니다.
코트의 왕이었던 그가 기꺼이 자신을 시스템의 일부로 내어주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내가 최고’라는 자기 뜻을 죽이고, ‘팀의 승리’라는 더 높은 뜻에 순명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시카고 불스는 한두 번이 아닌, 무려 여섯 번의 우승을 차지하는 전무후무한 왕조를 건설했습니다.
마이클 조던은 ‘고독한 왕’을 넘어, ‘위대한 팀의 리더’라는 더 큰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죽어야 그분이 삽니다.
그러나 나를 죽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면 쉽습니다.
십자가는 정체성입니다.
“저는 죽을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시는 분들은 어쩌면 아직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을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자신이 죄인이라고 믿으면
영원히 죄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고 믿게 하시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런던의 거리에서 마약에 중독된 채 살아가는 노숙자, 제임스 보웬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를 투명인간 취급했고, 그 자신도 스스로를 ‘쓸모없는 중독자’, ‘거리의 쓰레기’라고 여겼습니다.
그의 삶은 그저 오늘의 마약을 구할 돈을 구걸하고, 내일 아침 눈을 뜰 수 있을지 걱정하는 것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랬던 어느 날 밤, 그는 자신의 허름한 거처 복도에서 상처 입은 채 웅크리고 있는 길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그 순간, 그의 안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였습니다. 그는 며칠을 굶어야 할지도 모르는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고양이의 치료비를 냈습니다.
그리고 고양이에게 ‘밥(Bob)’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죠.
바로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쓸모없는 노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밥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정체성이 바뀐 것입니다. 
 
‘보호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습니다.
그는 이제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밥을 먹여 살려야 했습니다.
그는 밥을 어깨에 메고 거리로 나가 버스킹을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마약 중독자’를 본 것이 아니라, ‘어깨에 고양이를 멘 특별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자, 그 자신도 스스로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마약을 끊기로 결심합니다. 
 
지옥 같은 금단 증세 속에서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그의 곁을 조용히 지키는 밥을 보며
그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밥의 보호자다. 나는 무너질 수 없다.’ 
 
무엇이 제임스를 구원했습니까? 더 강력한 의지였을까요? 더 좋은 치료 프로그램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를 구원한 것은 ‘나는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소중한 존재’라는 새로운 정체성이었습니다.
‘노숙자’라는 낡은 정체성을 죽이고, ‘보호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믿었을 때, 그의 삶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로마서 6장 6절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이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소멸할 것이다’가 아니라, ‘소멸하였다’입니다.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가 아니라, ‘하지 않게 되었다’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 죄에 종노릇하던 나는 2천 년 전 골고타 언덕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미 사형선고를 받고 죽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세례의 신비입니다.
세례는 죄를 씻는 세탁기가 아니라, 옛 자아를 장사 지내는 장례식입니다.
그리고 그 무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걷기 위해 걷는 아기는 없습니다.
아기는 그저 이미 걷고 있는 엄마, 아빠를 봅니다.
그리고 그 작은 머릿속으로, 그 온 존재로 믿습니다. ‘아, 걷는 것이 정상이구나.
나도 저렇게 걷는 존재구나.’ 그 믿음이 아기의 첫걸음을 떼게 합니다.
넘어지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걷는 존재가 되어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영적 정체성은 여러분이 노력해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받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넘어지는 나에게 집중하지 마십시오. 나를 일으켜 세우시고 이미 온전하게 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래서 오늘, 여러분께 아주 작지만 강력한 영적 실천 하나를 제안합니다.
마음속에서 ‘아, 나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죄인이구나’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그 생각을 알아차리고 잠시 멈추십시오.
그리고 그 자책의 언어 대신, 믿음의 언어로 이렇게 선포해 보십시오. 
 
“주님, 저의 옛사람은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믿습니다.
이제 제 안에 사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신은 죄가 없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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