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마태오 18,15-20
가장 완벽하게 사람을 잃는 법; 결과주의자와 관계주의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명쾌하고 단순해 보이는 지침을 주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마태 18,15)
정말 단순하지 않습니까? 누가 잘못하면, 가서, 단둘이, 타이르라.
그런데 우리는 살면서 이 단순한 지침이 얼마나 어려운지 매일같이 체험합니다.
배우자의 사소한 습관, 자녀의 실수, 직장 동료의 잘못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갈등합니다.
‘이걸 지금 말해야 하나?
어떻게 말해야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여기서 우리는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 섭니다. ‘정의’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옳은 소리’를 해서 문제를 바로잡는 데 집중할 것인가, 아니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그 사람과의 ‘관계’를 지키는 데 집중할 것인가.
많은 이들이 이 둘은 함께 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둘 다 가능하다고, 아니, 사람을 얻는 것이 곧 모든 것을 얻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오늘 저는 여러분께 두 개의 저울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한쪽에는 ‘결과’를, 다른 한쪽에는 ‘관계’를
올려놓은 저울입니다.
이 두 저울은 우리에게 사람을 얻는 지혜, 그리고 사람을 잃는 어리석음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명확히 보여줄 것입니다.
첫 번째 저울은 ‘결과’에 모든 것을 건 저울입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의 영웅, ‘매그니피선트 세븐(Magnificent Seven)’이라 불렸던 미국 여자 체조 대표팀을 기억하십니까?
그 중심에는 루마니아 출신의 명장, 벨라 카롤리라는 코치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선수들의 재능을 금메달로 바꾸는 데는 귀신같은 능력을 지녔지만, 그 과정은
혹독했습니다.
특히 그는 목표를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선수가 보는 앞에서 특정 선수를 질책하고 모욕을 주는 것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 몸무게로 무슨 연기를 하겠다는 거야?” “정신 차려!”
그의 공개적인 질책은 선수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지만, 동시에 살아남기 위한 독기를 품게 했습니다.
마침내 결전의 날, 그의 팀은 완벽한 연기로 세계를 놀라게 하며 꿈에 그리던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겁니다.
카롤리 코치는 영웅이 되었고, 세상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외쳤습니다.
“내가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팀의 막내였던 도미니크 모치아누 선수는 자서전을 통해 카롤리 코치의 끊임없는
언어적, 정신적 학대를 폭로했습니다.
금메달의 영광 뒤에는 코치의 강압과 모욕으로 얼룩진 눈물이 있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코치는 ‘결과’는 얻었지만, ‘선수’는 잃었습니다.
그는 ‘금메달’이라는 명예는 얻었지만, 한 사람의 ‘영혼’을 잃었습니다.
이것이 왜 비극입니까?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마태 6,1)
코치는 다른 선수들과 세상의 인정을 받으며 선수를 다그쳤습니다.
그의 질책은 선수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한 채찍질이었습니다.
세상의 칭찬과 금메달이라는 결과, 그것이 그가 받을 상의 전부였습니다.
그는 이미 자기 상을 다 받았기에, 한 인간, 한 ‘자매’를 얻는 더 큰 상은 결코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저울의 반대쪽을 보겠습니다.
여기에는 ‘관계’에 모든 것을 건 한 성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위대한 윤리 신학자이자 의사인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한 귀족 부인이 성인에게 고해성사를 보러 왔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죄를 고백했지만, 정작 가장 큰 죄였던 다른 귀족과의 불륜 관계는 숨기고 있었습니다.
성인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그녀의 마음속 비밀을 알았지만, 고해소에서 그녀를 다그치거나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성인은 그 부인을 개인적으로 찾아가 아무도 없는 방에서 단둘이 만났습니다.
부인은 자신의 죄가 드러날까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예상 밖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인, 저는 며칠 동안 부인을 위해 기도하며
제가 가진 모든 공로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아침, 부인의 영혼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날카로운 질책 대신, 자신의 영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는 사랑의 고백 앞에서 부인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터뜨리며 숨겨왔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진심으로 회개했습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성인의 가장 충실한 영적 자녀이자 친구가 되어 평생 하느님을 따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보십시오. 성 알폰소는 무엇을 얻었습니까? 그는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고해사제라는 명성을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유일한 목표는 죄를 지적하여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을 구원하여 ‘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기에, 하느님으로부터 한 ‘자매’를 얻는 가장 큰 상을 받았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이 왜 그토록 ‘단둘이’ 만나라고 강조하는지 분명해집니다.
“네가 그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예수님의 목표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를 얻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순간, 우리의 관심은 ‘저 사람의 영혼’에서 ‘내 체면’과 ‘다른 사람의 평가’로 옮겨갑니다.
공개적인 질책은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는 있어도, 그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영혼 없는 성공, 금메달을 따고도 마음이 떠나버린 선수와 같은 비극을 낳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형제의 잘못을 마주합니다.
그때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코치가 될 수도 있고, 성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금메달을 얻고 사람을 잃을 수도 있고, 명성을 잃고 사람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정의를 세우기 전에, 사랑을 먼저 세우십시오. 사람을 얻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언제나 먼저입니다.
이번 한 주, 누군가의 잘못이나 고쳐주고 싶은 점을 발견했을 때, 즉시 말하려는 혀를 잠시 멈추어 주십시오.
그리고 먼저 그를 위해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해주십시오.
‘주님, 제가 저 형제(자매)를 미워하지 않고 진심으로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정말 말해야 할 때가 온다면, 반드시 단둘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영혼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이야기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사람을 얻는 예술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더 많은 친구와 형제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의 저녁에,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받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형제들을
얼마나 사랑으로 대했는지, 그 기준으로 심판받을 것입니다.
부디 우리 모두 사랑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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