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마태오 18,21─19,1
도저히 용서가 안 될 때, 당신이 놓치고 있는 단 한 가지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마태 18,21)
형제자매님들, 이 질문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시는 분, 아마 아무도 안 계실 겁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사람, 그 사람의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에 돌덩이가 얹히는 것 같은 그런 상처가 하나쯤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해야지, 이제 그만 잊어야지.’
수십 번, 수백 번 다짐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상처는 더 선명해지고 미움은 더 깊어지는 기이한 경험, 다들 해보셨을 겁니다.
마치 심리학의 유명한 ‘북극곰 실험’과 같습니다. “절대로 흰색 북극곰을 생각하지 마세요!” 라는
지시를 받으면, 오히려 머릿속은 온통 북극곰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의지의 채찍질은, 우리 영혼을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미움이라는 감옥에 더
단단히 가두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 18,22)고 하신 이 말씀은, 우리에게 불가능을 명령하신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이 풀리지 않는 숙제, ‘용서’에 대한 새로운 길을 찾아보려 합니다.
이 ‘의지의 함정’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실화가 있습니다.
나치 사냥꾼으로 유명한 시몬 비젠탈의 자전적 저서 『해바라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있던 그는 어느 날, 죽음을 앞둔 21살 나치 병사에게 불려갑니다.
병사는 유대인 일가족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인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죽기 전에 유대인에게
용서를 받고 싶다고 애원합니다.
비젠탈은 그의 끔찍한 고백을 끝까지 듣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용서의 표시도 하지 않고,
침묵한 채 병실을 나옵니다.
그는 평생 이 침묵의 무게에 대해 고뇌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용서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고, 어쩌면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의 이름으로 거대한 악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느꼈기 때문일 겁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의지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처 앞에서, ‘용서하려는 시도’ 자체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영화 '밀양'의 엄마 신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겠다’는 거룩한 결심을 하고 찾아갔지만, “나도 하느님께 이미 용서받았다”는 범인의 평온한 한마디에 처참히 무너져 내립니다.
내 힘으로 하려는 용서는 이렇게 실패하거나, 더 큰 상처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잠시 관점을 바꿔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너무 눈앞의 장애물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높은 산 정상을 향해 등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집채만 한 바위가 길을 막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바위만 쳐다보고 ‘이걸 어떻게 치우지? 이걸 어떻게 넘지?’ 하고 전전긍긍한다면, 그 바위는 세상에서 가장 큰 절망의 벽이 될 겁니다.
하지만 잠시 고개를 들어 우리가 가야 할 저 높은 산 정상을 바라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갑자기 그 바위는 정상으로 가는 수많은 과정 중 하나로, 잠시 딛고 넘어가야 할 디딤돌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용서라는 과제가 바로 그 ‘집채만 한 바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산 정상’은 바로 ‘사랑’입니다.
용서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바위와 씨름하는 것입니다.
대신, 사랑하려고 하십시오.
저 높은 정상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그 바위는 더 이상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사랑의 여정 위에 놓인 하나의 과정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온 삶으로 증명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1993년, 미국의 메리 존슨은 외아들을 총으로 쏴 죽인 16세 소년 오셰아 이스라엘을 증오했습니다.
그녀는 복수심으로 폐인처럼 살았습니다.
하지만 몇 년 후, 그녀는 교도소로 그를 찾아갑니다.
처음에는 증오를 터뜨렸지만, 만남을 거듭하며
깨닫습니다.
자기 앞에 있는 것은 괴물이 아니라, 두려움에 떠는 한 ‘어린아이’라는 사실을요.
그 순간, 메리는 ‘용서하려는 노력’을 그만둡니다. 대신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오셰아가 출소하자, 그녀는 그를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영적인 아들’로 삼습니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 함께 용서와 치유를 위한 재단을 이끌고 있습니다.
유영철에게 아들을 잃고 그를 양자로 삼았던 고정원 씨처럼, 메리는 사랑을 선택했을 때, 용서는 그 사랑의 길 위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로 돌아가 봅시다.
임금은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을 어떻게 해줍니까?
법과 원칙대로 그를 감옥에 가두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를 탕감해 주었다.” (마태 18,27) ‘가엾은 마음’, 바로 사랑입니다.
임금은 사랑으로 종을 보았기에, 용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그 종은 어땠습니까?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자,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며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는 자기가 받은 거저 받은 사랑을 완전히 잊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힘과 계산, 세상의 법으로 살아가려 했습니다.
그 결과는 파멸이었습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 종과 같기 때문입니다.
임금에게 받은, 하느님 아버지께 받은 그 엄청난 사랑을 잊고, 내 힘으로, 내 의지로, 내 상처의 크기만 계산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용서의 힘은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먼저 사랑해주신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강론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겠습니다.
용서하려 애쓰지 마십시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사랑하려 하십시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삶으로 가져가야 할 유일한 실천 방법입니다.
나에게 상처 준 그 사람을 억지로 ‘용서’하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대신, 그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미움이 솟구칠 때마다 잠시 멈추고 이 짧은 기도를 바쳐주십시오.
“주님, 제가 저 사람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눈으로 저 사람을 보게 해 주십시오.”
이 기도는 마법의 주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기도는, 내 시선을 눈앞의 바위에서 저 높은 산 정상으로, 내 상처에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로 옮겨주는 놀라운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과정입니다. 그를 사랑하려 할 때, 나 역시 새로 태어날 것입니다.
원수가 있습니까? 사랑하십시오.
‘용서해야지’, 가 아닌 ‘사랑해야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을 덮어줄 능력을 소유한 하느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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