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일
오늘 예수님의 대화 상대는 어떤 사람입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본문의 내용을 보면, 이 사람은 젊고, 가진 것이 많고, 평소에 율법 준수에 성실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유다 전쟁사’라는 역사서를 남긴, 1세기 유다의 정치가이며 역사가였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당시에는 바리사이파에 입당하기 전에 이름난 종교 지도자들을 두루 만나는 관습이 있었으며, 자신도 청년기를 그렇게 보냈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이 젊은이도 그러한 전통에 따라 예수님을 찾은 것으로 보이며, 율법 준수는 따라서 기본에 속했을 것입니다.
유다교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이란 우선 하느님에게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음을, 나아가 하늘 나라에 이르게 됨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 길은 오직 하느님 뜻이 담긴 율법 준수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젊은이로서는 그 많은 율법 가운데, 다시 말해서 글로 쓰여 있던 성문율법(=구약성경 토라)과 말로 전해진 구전율법(=미시나, 훗날 탈무드의 기초가 됨)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의미 있는 율법인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떤 것들입니까?”
예수님은 이 질문에, 지금도 그러하지만,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율법 가운데 율법, 율법의 심장이라 말할 수 있는 십계명을 들어 답하십니다. 흔히 우리는 십계명 가운데 1-3계명을 하느님께 관한 계명으로, 그리고 4-10계명을 사람에 관한 계명으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 또는 하느님 섬김에 관한 계명인 1-3계를 생략한 채, 인간사회에 관련된 계명들만 언급하고 계십니다. 젊은이에게는 너무나 실망스러운 답변이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뻔한 내용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율법 라삐들이 한목소리로 그렇게 가르쳤고 자신이 보기에도 가장 중요한 하느님에 관한 율법이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의 반응은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젊은이의 퉁명스러운 이 반응으로 보아 당시 유다교 지도자 또는 지도자가 될 사람들의 의식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로 치부하고 있는 계명, 그것도 하느님 사랑 또는 섬김에 관한 계명이 아니라, 인간 세계에 관한 계명이기에 이러한 표현을 토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것들을 중시하고 철저하게 지켜나갈 때, 비로소 하느님 사랑에 있음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이 바로 이웃 사랑에 있음을 역설하고 계신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웃 사랑을 그런 것들로 취급하고 있는 이 젊은이가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라는 현실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서 그 길을 여쭌 젊은이와의 대화 속에서, 그 길을 알려주시면서도,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의 선물임을 넌지시 일러주십니다. 하느님 사랑이든 이웃 사랑이든, 그것은 구원이라는 이 무상의 선물에 대한 감사의 표현일 수밖에 없음은 내일 복음 말씀 속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이 일러주신 길 따라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 사랑에 이를 수 있음을 가슴에 새기며, 그것조차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임을 살펴나가는, 소중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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