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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1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08-18 조회수 : 147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마태오 19,16-22  
 
전례의 목적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계명만 잘 지키면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실천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러 옵니다.
예수님은 결국 계명은 이웃 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은 못 하겠다며 슬픈 얼굴로
돌아갑니다.
왜 이웃 사랑의 계명은 잘 지킨다고 하면서 실천은 이토록 어려울까요?
운동선수가 경기장에서 잘 못 뛴다면 그건 평소에 연습을 안 해서 그렇습니다.  
 
1973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16살 소년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납치범들은 소년의 할아버지에게 1,7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220억 원에 달하는 거액의 몸값을 요구합니다.
소년의 할아버지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당시 세계 최고의 부자, 석유왕 J. 폴 게티였습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과연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손자를 위해 돈을 낼 것인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게티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내가 한 푼이라도 주면, 나머지 열네 명의 손주들도 똑같이 납치될 것이다.”라는 냉정한 이유였습니다.
몇 달 뒤, 소년의 잘린 귀가 신문사로 배달됩니다.
“할아버지, 제발 저희를 버리지 마세요.”라고 쓴 손자의 애절한 편지와 함께였습니다.
그런데도 게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편지를 찢습니다.
결국 아이 아버지에게 마지못해 세금 감면이 가능한 일부 금액만 ‘빌려주고’, 나중에 아들에게 이자까지 받아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충격적인 이야기 앞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냉혹해질 수 있을까요? 왜 그는 세상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의 피붙이인 손자와 그 아버지를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선뜻 내어놓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을까요?
그 답은 간단합니다.
그에게는 ‘포기하는 연습’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폴 게티에게는 종교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감리교 신자였고, 어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자였습니다.
어머니는 평생을 검소하게 살며 아들에게 자선과 신앙의 중요성을 가르치려 했습니다.
하지만 게티는 부모의 신앙을 물려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사업수완만을 물려받아 스스로의 힘으로 더 큰 부를 이뤘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주신 ‘근원’, 즉 자신을 낳아준 부모와 그들이 믿었던 하느님께 감사하며 작은 것이라도 되돌려 드리는 ‘봉헌의 연습’을 할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이 봉헌의 연습이 우리가 매일, 혹은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 게티와는 정반대의 삶을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에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리는 ‘붕어빵 부부’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습니다.
김동현, 원강희 부부는 희귀병을 앓던 아들 민우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10년이 넘게 매일같이 붕어빵을 팔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들은 하늘나라로 떠났고, 아들을 위해 모았던 3천만 원은 주인을 잃었습니다.
아들에게 더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게 된 순간, 그들의 봉헌은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향해 매일같이 바치던 그 사랑의 ‘연습’은 부부의 영혼에 깊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들을 위해 모았던 돈 전액을, 아들의 이름으로 다른 희귀병 아이들을 위해 기부했습니다.
아들 한 사람에게 향했던 사랑의 봉헌은, 방향을 바꾸어 이 세상의 모든 아픈 아이들을 향한 더 큰 사랑의 강물이 되었습니다.
하루 만 원씩 매년 365만 원을 15년 이상 기부한 붕어빵 아저씨도 있습니다.  
 
예배는 이와 같습니다.
이 부모는 아이를 생각하며 언제나 자신들의 아이가 되어준 것에 대해 감사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아이의 치료비를 위해 돈을 모은 것은 그 아이에게 봉헌하는 연습을 한 것입니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을 때는 더 쉽게 자신들의 아이에게 해 주었을 것을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 꾸준한데 바뀌지 않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이 어쩌면 J. 폴 게티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예배가 없는데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봉헌의 연습’을 하는 거룩한 장소가 바로 우리가 지금 드리는 ‘예배’, 곧 미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 안에서”(요한 4,24) 드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영과 진리'는 바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총과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은총과 말씀은 우리 마음에 자연스러운 ‘감사’를 솟아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이 감사는, “제가 받은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오니, 주님께 기꺼이 돌려드립니다”라는 봉헌의 열망으로 이어지고, 이 연습이 이웃에게로 자연스럽게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내가 무언가를 청하는 것이 아닌 이웃 사랑을 위한 연습을 하는 장으로 삼아야 합니다.  
 
거창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십일조 정도는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을 넘으면 이제 쉽게 이웃 사랑으로 실천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 곧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항상 선악과 다음에 성취됩니다.
예배, 곧 전례의 목적은 봉헌하는 연습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2코린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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