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마태오 20,1-16
Soli Deo Gloria: 가장 위대한 장인의 비밀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주 낯익은 감정을 마주합니다.
바로 ‘불만’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포도밭에서 땀 흘려 일한 품꾼들은, 오후 늦게 와서 잠깐 일한 사람과 똑같은 품삯을 받자 주인에게 거세게 항의합니다.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너무나 인간적이고,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항의입니다.
우리 역시 각자의 포도밭에서 매일 고되게 일합니다.
가정을 위해, 직장을 위해,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교회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이것뿐일까?’, ‘왜 나의 수고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걸까?’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거룩한 ‘일’이, 어느 순간 견딜 수 없는 ‘불만’으로 바뀌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하늘 나라의 가장 마지막 자리로 밀려나기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불만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두 명의 ‘첫째’였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한 사람은 위대한 영웅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성실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똑같이 불평하며 가장 비참한 마지막 자리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이었던 베네딕트 아널드 장군을 아십니까? 그는 전쟁 초기, 누구보다
용맹하게 싸워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조지 워싱턴이 가장 신임하는, 모두가 인정하는 ‘첫째’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공로에 비해 충분한 인정과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서 조국을 위한 ‘봉사’는 점차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이 불만은 더 큰 명예와 돈을 갖고 싶다는 ‘소유욕’과 ‘집착’으로 이어졌고, 결국 그는 조국을
배신하고 중요 기밀을 영국군에게 팔아넘기는 반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역사에 가장 위대한 영웅이 될 수도 있었지만, 감사 없는 그의 마음은 그를 가장 수치스러운 반역자, 즉 ‘꼴찌’의 자리로 추락시켰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평생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아버지를 잘 섬긴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탕자였던 동생이 돌아오자 아버지가 성대한 잔치를 열어주는 것을 보고 그는 분노에
휩싸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종처럼 섬기며 단 한 번도 분부를 어긴 적이 없는데,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의 오랜 섬김은 아버지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당연히 받아야 할 품삯을 계산하는 ‘노동’이었습니다.
그의 불만은 ‘내 몫’을 소유하려는 집착이 되었고, 결국 그는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가장 불쌍한 ‘꼴찌’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여기, 정반대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꼴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늘 감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중세 프랑스의 전설, '노트르담의 광대' 이야기를 아십니까?
가난한 광대 바르나베는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학문도 예술도 아는 것이 없어 성모님께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쓸모없는 ‘꼴찌’ 수도사라고 슬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결심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가장 잘하는 곡예를 성모님께 바치기로. 그는 성모님 상 앞에서 온 힘을 다해 땀 흘리며 자신의 모든 재주를 선보였습니다.
다른 수도사들이 신성모독이라며 그를 꾸짖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모님 상이 살아 움직여, 그의 땀을 닦아주며 미소를 지어 보인 것입니다.
그의 봉사는 너무나 짧고 세상의 기준으로는 보잘것없었지만, 받은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는 순수한 감사의 마음은, 그 어떤 위대한 신학 강의보다도 성모님을 기쁘게 해드린
‘첫째’의 예물이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병원의 구두닦이, 앨버트 렉시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30년 넘게 미국 피츠버그 어린이 병원에서 구두를 닦았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는 그저 평범한 구두닦이, ‘꼴찌’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픈 아이들을 볼 때마다, 자신이 건강하게 일할 수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그는 그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이 평생 구두를 닦으며 받은 팁을 단 1센트도 쓰지 않고 모았습니다.
그가 은퇴하던 날, 그가 병원에 기부한 총액이 공개되었습니다.
무려 20만 달러, 우리 돈으로 2억 원이 넘는 거금이었습니다.
그 돈은 모두 가난한 아이들의 치료비로 쓰였습니다.
그는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자신이 가진 가장 작은 것을 나누었고, 수많은 아이들의 생명을 구한 하느님 나라의 위대한 ‘첫째’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은 불평하는 첫 품꾼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냐?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하늘 나라의 첫째와 꼴찌를 가르는 기준은 ‘일의 양’이나 ‘노력의 시간’이 아닙니다.
바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는가, 아니면 ‘품꾼의 마음’에 머무르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베네딕트 아널드와 큰아들은 ‘품꾼의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과 그 대가를 계산하며, 주인의 후함(은총)을 시기하고 불평했습니다. 반면, 광대 바르나베와 구두닦이 앨버트는 ‘주인의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일할 기회를 주신 것 자체에 감사했고, 자신의 품삯을 계산하기보다 주인의 기쁨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들에게 봉사는 노동이 아니라 사랑이었고, 시간은 고역이 아니라 축제였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바이올린을 만든 명장,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의 이야기로 강론을 마칠까 합니다.
그가 만든 바이올린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수십억 원을 호가하며 최고의 소리를 냅니다.
그는 단연 악기 제작 분야의 ‘첫째’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비밀을 알고 싶어 했지만, 그는 침묵했습니다.
훗날 그의 바이올린 내부를 수리하던 장인들이 그 비밀을 발견했습니다.
스트라디바리는 자신이 만든 모든 바이올린의 가장 깊숙한 곳, 아무도 볼 수 없는 안쪽에 라틴어로 ‘Soli Deo Gloria(오직 하느님께 영광)’라는 글귀를 새겨 넣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자랑하는 대신, 자신에게 이런 재능을 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를
악기 속에 숨겨 놓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치는 봉사와 희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일을 하더라도, 그 안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결국 빈 껍데기일 뿐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가장 평범한 일 하나—설거지, 운전, 서류 작업—를 할 때,
불평 대신 스트라디바리의 마음을 품어봅시다. ‘주님, 이 일을 할 수 있는 재능과 건강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모든 영광을 당신께 바칩니다.’
이 작은 감사의 실천이, 고된 노동의 시간을 기쁨의 축제로 바꾸고, 우리를 하늘 나라의 ‘첫째’ 자리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콜로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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