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여라, 하나!
오늘 복음 말씀은 마태오 복음 23장의 내용으로서, 예수님은 유다교 지도자들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겨냥한 비난의 말씀들, 나아가 저주의 말씀들을 쏟아내십니다. 아마도 복음 저자는 자신이 속해 있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유다교와 논쟁을 벌이는 데에 유용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바로 앞서는 부분에서, 예수님은 이들을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로 소개합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최고의 입법자인 모세의 합법적인 후계자이며 해설자임을 의미하며, 따라서 예수님은 분명 이들의 존재와 권위만큼은 인정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문제는 행실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따라서 예수님은 따르지 말아야 할 그들의 위선적 행실을 불행이라는 표현에 실어 고발하십니다.
일곱 차례에 걸쳐 불행 선언이 뒤따르는데, 오늘은 세 가지, 내일은 두 가지, 그리고 마지막 두 가지는 모레 울려 퍼질 것입니다.
첫째 불행 선언은 하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는 사람들,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 사람들로 고발됩니다. 율법 준수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고 있던 유다교 지도자들에게 율법 자체는 그렇게 중요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세부 율법을 양산해 내기에 이른 율법 해석의 다양성은 오히려 하늘 나라 입성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기에, 이러한 불행이 선언됩니다.
둘째 불행 선언은 개종자에 관한 것입니다. 사실 개종이라는 용어는 유다교에 낯선 개념이지만, 오늘 복음 속의 개종자는 문맥상 유다인이 아닌 이민족으로서 할례를 받고 유다교, 특히 바리사이들의 엄격한 율법 준수를 수용한 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개종자를 얻기만 하면, 그를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개종자를 전례적 독선과 위선에 적응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신앙의 핵심을 은폐하는 행위를 겨냥하여 불행이 선언됩니다.
셋째 불행 선언은 맹세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맹세가 성전을 두고 한 것이든, 제단을 두고 한 것이든, 하늘을 두고 한 것이든, 모두 하느님 앞에서 이루어진 맹세이므로 꼭 지켜야 하는 것으로 가르치십니다. 맹세의 대상은, 다시 말해서 맹세의 질과 양은 다음 문제라는 것입니다. 특히 율법을 해석할 권리와 의무를 지고 있던 율법 학자들이 이러저러한 문제 앞에서 율법을 종교적으로만 해석하려는 경향, 그럼으로써 때로는 맹세 자체보다는 맹세의 질과 양을 중시하려 했던 경향을 겨냥하여 불행이 선언됩니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신앙생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신앙생활에는 권위가 있을 수 없으며, 기쁨과 보람 또한 함께할 수 없습니다. 말한 대로 행동하고, 아는 대로 행동하는 자세를 뛰어넘어, 우리 신앙인은 믿는 대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만나는 모든 사람과 신앙의 기쁨을 나누며, 신앙이 무엇인지를 그들이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그럼으로써 그들과 함께 하늘 나라를 지향하는, 소중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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