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성인 축일은 보통 성인의 사망일, 곧 천상 탄일로 지내기에, 오늘이 요한 세례자의 축일인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요한 세례자 축일 하면 그가 태어난 날에 대축일로 지내는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가톨릭교회 전례에서 성인들 가운데 탄생일을 축일로 지내는 경우가 성모님(9월 8일)과 요한 세례자(6월 24)에게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구원의 역사 속에서 요한 세례자가 차지하는 자리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끔찍한 사건 하나가 소개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서에는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예외에 속하는 가장 대표적인 내용이 바로 오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하는 말씀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기는 하나, 요한의 죽음 이야기가 생생하게, 마치 목격자가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것처럼, 기술되고 있습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났구나” 할 정도로 세례자 요한의 권위와 존재는 대단했으며, 아울러 그의 죽음의 충격 또한 지대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처참한 죽음이 헤로디아의 앙심에서 촉발되었다 하더라도, 문제의 핵심 인물은 헤로데(안티파스: 우리 귀에 익숙한 헤로데가 아니라, 그의 아들)입니다. 헤로데는 분명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의 말을 기꺼이 듣곤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호기롭게 내뱉은 말 한마디가 결국 자기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의롭고 거룩한 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 따라서 두려워하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판단, 당황해하면서도 질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관용, 이 모든 인간적인 모습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경비병을 보내어 가져오라고 한 요한의 머리는 바로 자신의 인간성이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부정해 버렸으니, 남은 그의 인생은 살아도 죽은 인생, 영혼 없는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복음 속의 헤로데에 대해 말하면 말할수록, 또 다른 인물이 쉽게 떠오릅니다. 의롭고 거룩한 법정에서 죄가 없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대사제들에 의해 선동된 유다인 군중 앞에서 정작 자신은 책임이 없다는 표시로 손을 씻었다고 하지만(마태 27,24),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수용한 빌라도의 모습이 겹칩니다. 요한의 등장과 함께 메시아의 선구자로 다시 오리라는 예언자 엘리야의 귀환이 실현되었다면, 그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그대로 예시한, 그야말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예고한 사건이었습니다.
헤로데와 빌라도가 보여주었던 모습, 하느님 나라의 건설 도구인 정의와 진리와 평화를 박해하는 못난 행위는 나와 상관없는 모습들이 아닙니다. 사실 이러한 모습들은 악의보다는 무기력, 이기심, 비열한 침묵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하느냐, 아니면 나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느냐가 참 신앙인을 가름하는 판단 기준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남이 아니라 조금만이라도 나를 희생하여, 가족들은 물론 이웃들에게 행복과 평안을 누리도록 배려하는, 소중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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