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6,17-29
사람이 죽어갈 때의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공모다
찬미 예수님, 오늘 우리는 한 의로운 예언자의 참혹한 죽음을 기억합니다.
연회의 흥을 돋우기 위한 대가로, 한 소녀의 변덕스러운 요구에 의해, 진실을 외치던 거룩한 예언자의 머리가 쟁반에 담겨 바쳐졌습니다.
오늘 복음(마르 6,17-29)을 들으며 우리는 분노합니다.
그리고 질문합니다.
“도대체 누가 요한을 죽였는가?” 답은 명확해 보입니다.
부도덕한 욕망에 사로잡힌 헤로디아, 그녀의 유혹적인 춤으로 어머니의 증오를 실현시킨 딸 살로메, 진실이 두려웠지만 체면 때문에 악을 허락한 비겁한 왕 헤로데, 그리고 칼을 휘두른 이름 모를 군사. 이들이 바로 살인자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들뿐일까요? 그 연회장에 함께 앉아 있던 수많은 신하와 귀족들은 어떻습니까?
한 예언자의 목이 아무렇지 않게 베어지는 그 끔찍한 광경을, 술잔을 든 채 침묵하며 지켜보았던 그들은 아무 죄가 없을까요?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었으면서도, “불편한 진실이니 모른 척하자”며 외면했던 갈릴래아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만약 그들이 한목소리로 “예언자를 죽여서는 안 됩니다!”라고 외쳤다면, 헤로데는 과연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오늘 기념일은 우리에게 무서운 진실을 상기시킵니다.
정의가 죽어가는 순간의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공모(共謀)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 진실을 뼈아프게 보여주는 두 개의 실제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도시 한복판에서, 다른 하나는 한적한 시골길 위에서 일어났지만, 그 본질은 소름 돋을 정도로 똑같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1964년 3월, 미국 뉴욕 퀸스의 한 주택가에서 일어났습니다.
키티 제노비스라는 젊은 여성이 새벽 3시경,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괴한의 칼에 찔렸습니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오, 하느님! 저 사람이 저를 찔렀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아파트 몇몇 집의 불이 켜지고, 창문으로 사람들이 내다보았습니다.
한 남자가 “저 여자를 내버려 둬!”라고 소리치자, 범인은 잠시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아무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고, 아무도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범인은 다시 돌아와 그녀를 또 찔렀습니다.
키티는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지만,
범인은 집요하게 그녀를 쫓아가 세 번째 공격을 가했습니다.
이 끔찍한 살인은 30분이 넘게 이어졌습니다. 나중에 경찰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최소 38명의 이웃이 그 비명 소리를 듣거나 공격 장면을 목격했지만, ‘내가 나서기 싫다’는 이유로, ‘다른 누군가 신고하겠지’라는 생각으로, 그저 침묵하고 방관했습니다.
이 차가운 대도시의 침묵은,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던 버스 안에서도 똑같이 반복되었습니다.
중국의 단편 영화 ‘버스 44’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버스에 올라탄 강도 두 명이 승객들을 위협하고, 젊은 여성 운전사를 버스 밖으로 끌고 나가 풀숲에서 겁탈하기 시작합니다.
운전사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지만, 버스 안의 승객들은 창밖을 외면하거나, 못 들은 척 눈을 감아버립니다.
바로 그때, 안경을 쓴 한 젊은 남자가 소리칩니다. “당신들 뭐 하는 거야! 그만둬!” 그는 버스에서 내려 강도들에게 달려들지만, 역부족입니다.
그는 강도의 칼에 다리를 찔리고, 길가에 버려집니다.
잠시 후, 운전사가 넋이 나간 모습으로 버스에 돌아옵니다.
그녀는 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외면했던 승객들을 훑어봅니다.
그때, 다리를 절뚝이며 버려졌던 젊은 남자가 버스 문을 두드리며 태워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운전사는 그를 향해 소리칩니다.
“내려요!” 그리고는 문을 닫고 그 영웅을 길에 내버려 둔 채, 버스를 출발시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버스는 낭떠러지를 향해 돌진하여 강물 속으로 추락해버립니다.
키티의 비명을 외면한 38명의 이웃과, 운전사의 고통을 방관한 버스의 승객들.
그들의 침묵은 운전사의 존엄성을 짓밟았고, 그녀의 영혼을 죽였습니다.
도울 수 있었으면서 돕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소극적인 형태의 가장 잔인한 살인이었던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빌라도와 로마 군인, 율법 학자들뿐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바라바를 풀어주시오!”라고 외쳤던 군중들, 그리고 두려워 도망쳤던 제자들,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살릴’ 기회가 있었지만, 그들은 침묵하거나 악에 동조했습니다.
사랑과 정의의 문제 앞에서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살리려 하지 않는 자는, 소극적으로 죽이는 일에 동참하는 자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불의 앞에서 침묵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의 삶은 ‘살리는 일’에 대한 적극적인
투신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은 결코 ‘방관자의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불의 앞에서, ‘나는 어느 쪽에 가담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선택해야 합니다.
1989년 6월 5일, 천안문 광장에서 수많은 민주화 시위가 피로 진압된 바로 다음 날 아침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공포와 침묵에 잠겨있던 그 순간, 장안대로(長安街) 위에 한 줄로 늘어선 탱크 대열 앞으로,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한 남자가 양손에 쇼핑백을 든 채 홀연히 나타났습니다.
그는 그 거대한 강철 괴물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탱크가 오른쪽으로 피하려 하자, 그도 오른쪽으로 움직였습니다.
탱크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자, 그도 왼쪽으로 따라 움직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탱크 위로 올라가, 조종석을 향해 무언가 말을 건넸습니다.
전 세계가 숨죽여 지켜보았지만, 그가 누구인지,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는 그저 ‘탱크맨(Tank Man)’으로만 불릴 뿐입니다.
그는 이름도, 권력도 없었지만, ‘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죄’를 짓기를 거부했고, 침묵하는 다수가 아닌 행동하는 한 사람이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김수환 추기경님이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죄가 됩니다.” (야고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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