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부와 쇼핑몰 안을 걷고 있었습니다. 물건을 사러 간 것은 아니고, 쇼핑몰 안에 있는 어느 식당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많은 상점이 있었는데, 그 신부가 갑자기 그 자리에 서더니 “저것 너무 멋있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명품을 파는 가게였습니다. 그래서 ‘신부가 명품을 좋아하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그 명품 가게 안의 진열이 너무 멋있지 않냐면서 감탄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선 세종대왕 때에 지어진 ‘석보상절’이라는 불경 해설서에서는 아름다움의 ‘아름’을 ‘나’로 해석하고 있다고 합니다. 즉, 아름다움은 곧 ‘나다움’과 맞닿아 있는 감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명품이 아니라 상품을 진열하는 방식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신부의 모습처럼, 남들은 모두 별로라고 말하는 것을 아름답다면서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이 차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이는 다른 이가 바라보는 아름다움을 무시하고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각자의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세상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알리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공생활을 시작하며 나자렛 고향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일부를 봉독하고 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은총의 말씀에 군중들은 놀라워했지만, 곧바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라고 의문을 표시합니다. 함께 기뻐해야 할 중요한 순간에,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틀린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고,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까지 합니다.
익숙함과 선입견 때문에 주님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조화를 깨뜨리는 모습이 됩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 역시 간직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다양하게 활동하시는 주님을 자기만의 잘못된 판단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명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주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시길 원합니까? 주님과 언제나 함께해야 우리의 구원도 가능하게 됩니다. 따라서 익숙함과 선입견으로 자기만 맞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의 기쁜 소식이 이루어짐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을 주고 받는 것은 양방향에서 태양을 느끼는 것과 같다(데이비드 비스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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