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5,33-39
미사는 제사인가, 잔치인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따져 묻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그들의 눈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율법을 어기는 방종한 이들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인류가 그토록 기다려온 신랑,
즉 메시아와 함께하는 기쁨의 혼인 잔치라고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사이들은 이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고, 차가운 율법의 잣대만 들이대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잔치의 본질’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모든 잔치의 본질은 ‘기쁨’과 ‘사랑의 나눔’입니다. 잔치의 모든 규칙과 예절은 바로 이 기쁨과 사랑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가톨릭 교회의 가장 큰 잔치인 ‘미사 성제’는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도 잔치의 본질인 기쁨과 사랑은 잃어버린 채, 차가운 규칙과 형식에만 갇혀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강론은 우리 전례가 왜 점점 형식화되고 유연성을 잃어가는지에 대해 묵상하고자 합니다.
17세기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총대주교 니콘이 당시 오역과 오류가 많았던 전례서를 그리스 원문에 가깝게 개혁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개혁의 내용은 대부분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십자성호를 그을 때 손가락 두 개를 쓸 것인가, 세 개를 쓸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옛 예법’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믿었던 수많은 신자들, 이른바 ‘옛 신자들(Old Believers)’은 이 개혁을 악마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들에게 전례의 형식은 사랑과 일치라는 목적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결국 이 사소한 규칙의 차이는 교회의 대분열을 낳았고, 수많은 옛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시베리아로 도망가거나, 심지어는 ‘배교하느니 죽겠다’며 마을 전체가 불속으로 뛰어들어 집단 자살하는 끔찍한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이 비극은 오늘 우리 본당 안에서도 작은 모습으로 재현될 수 있습니다.
작은 실수를 참아내지 못해, 아예 신자를 냉담 시키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대부분 전례를 ‘잔치’가 아닌 ‘제사’로 보는 것에서
기인합니다.
제사에서는 실수하면 안 되지만, 잔치는 기쁨이 목적이기에 어느 정도 실수는 품어줄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신학자 장 바니에(Jean Vanier)가 세운 장애인 공동체 ‘라르슈(L'Arche)’의 이야기는, 사랑이 어떻게 딱딱한 전례 규칙을 생명의 예식으로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실화입니다.
라르슈 공동체의 미사는 종종 소란스럽고 예측 불가능합니다.
발달 장애를 가진 한 형제가 갑자기 제대 위로 올라가 춤을 추기도 하고, 누군가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엄격한 전례 규칙의 잣대로 보면, 그것은 ‘신성모독’에 가까운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 바니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전례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가장 약한 이들이 환대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완벽한 예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바리사이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율법과 단식 규정들은 ‘낡은 가죽 부대’였습니다.
그것은 옛 계약 아래에서, 하느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는 엄숙한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 포도주’, 즉 사랑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이 새로운 사랑은 더 이상 낡은 제사의 부대에 담길 수 없었습니다.
새 포도주는 이제 전례가 슬픔의 제사에서 기쁨의 ‘혼인 잔치’로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를 의심하며 겉돌던 시절, 어머니께서 주시던 단팥빵과 흰 우유는 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는 기쁨의 잔치였습니다. 바로 그 기쁨 뒤에 순종이 따라왔습니다.
기쁘지도 않은데, 어떻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의 전례가 계속 규칙만을 강조하며 이 기쁨을 잃어버린다면, 그 안에서 어떻게 우리가 사랑으로 순종하고 세상으로 파견될 수 있겠습니까?
‘로마의 사도’, ‘기쁨의 성인’이라 불리는 성 필립보 네리(St. Philip Neri, 1515-1595)의 삶이
그 답을 보여줍니다.
그는 종교개혁 이후 딱딱하고 엄격해진 교회의 분위기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사 전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유쾌한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함께 소풍을 가고,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미사를 집전하기 직전에 우스갯소리가 담긴 책을 읽으며 웃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행동이 사제로서의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딱딱한 규칙보다, 살아있는 기쁨과 사랑이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드린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미사는 우리가 지켜야 할 의무 목록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신랑 예수님과 나누는 가장 친밀하고 기쁜 사랑의 대화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가 신자들과의 미사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십니까? 여러 교황님들께서 그의 성덕과 로마에서의 영향력을 높이 사 추기경으로 임명하려 하셨습니다.
특히 교황 클레멘스 8세(Pope Clement VIII)는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전했습니다.
그는 추기경의 붉은 모자(galero)를 가져온 사절 앞에서 그 모자를 공중으로 휙 던지며 “천국, 천국, 저는 천국을 더 좋아합니다!(Paradiso, paradiso, preferisco il paradiso!)”라고 외쳤습니다.
그에게 신자들과의 미사는 바로 이 천국의 혼인 잔치와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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