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감정은 희망입니다. 독일 속담에 “희망은 가장 마지막에 죽는다”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죽음 전까지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며, 희망이 없음은 죽음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라틴어 속담에도 “내가 숨을 쉬는 한 희망은 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고생 끝에 낙이 온다’라는 뜻의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어려움에도 삶을 거뜬하게 살아낼 수 있다는 믿음이 희망인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기대와 희망을 같은 의미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대가 무너지면 희망도 사라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자 하는 기대,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자 하는 기대, 그 기대가 깨졌을 때 희망도 없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기대와 희망은 다릅니다. 기대가 무너져도 더 잘될 것이라는 희망을 충분히 품을 수가 있고, 좋은 미래가 내게 열릴 것이라는 희망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희망은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현재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싸울 수 있게 합니다. 자기 기대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희망으로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희망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솟아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희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소개하지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민족이 너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3)의 성취자라는 뜻입니다. 또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왕국(2사무 7,12-16)을 이루시는 메시아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특히 천사가 요셉에게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라고 명령하지요. 예수는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에서 온 이름으로,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희망인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철저히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예수님을 잉태한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오늘은 우리를 구원할 희망의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시작이 됩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 잉태부터 시작해서 전 생애에 보여 주셨던 믿음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성모님의 공경하고 그분의 삶을 따르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 좋은 모범을 보여 주신 분의 탄생일인 오늘을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축하의 마음을 가지면서, 동시에 성모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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