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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1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09-18 조회수 : 120

루카 7,36-50 

 

내 용서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  

 

 

오늘 우리는 루카 복음에서 매우 대조적인 두 인물을 만납니다.

바리사이 시몬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지만, 그 어떤 환대의 예의도 갖추지 않았습니다.

반면, 그 동네에서 '죄인'이라 불리던 한 여인은 아무런 초대도 없이 잔치에 불쑥 찾아와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리며 값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시몬은 여인을 속으로 판단했고,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행동을 칭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보였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종종 용서와 무관심을 혼동합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덮어준다'고 하면서 사실은

'관심을 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나는 저 사람을 용서했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용서는 용서받는 사람에게는 더욱 깊은 외로움과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안겨줄 뿐입니다. 

 

피 흘림 없는 용서는, 어쩌면 그냥 '귀찮다'는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관계를 끊고 싶기 때문에, 더 이상 고통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의 잘못을 '외면'하는 것을 '용서'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창동 감독의 한국 영화 '밀양'에서 주인공 신애 씨가 겪는 처절한 고통과 깊이 연결됩니다.

자신의 아들을 유괴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로 찾아간 신애 씨.

그녀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나는 당신을 용서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범인은 이미 하느님께 용서받았다며 평온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오히려 신애 씨는 더욱 큰 절망과 분노에 휩싸입니다.

왜 신애 씨의 '용서'는 그녀를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렸을까요? 

 

그것은 그녀의 용서가 '피 흘림의 용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신애 씨의 용서는 범인과 '같은 공동체로 함께 살아가려는' 용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용서였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 모든 고통을 초월하여 당신을 용서할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이다'라는 자기 의(義)를 증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 용서 안에는 범인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함께 같은 공동체 안에서의 미래를 만들어가려는 진정한 사랑의 피 흘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용서는 외려 범인에게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무관심의 메시지를

전달했을 뿐입니다.

그 결과는 더욱 깊은 고립과 상처였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녀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됐어, 알아서 해. 이제 너한테 더 이상 신경 안 쓸 거야'라고 말하며 등을 돌립니다.

겉으로는 '용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관심'과 '방임'입니다.

이 아이는 물리적인 학대를 당하지 않았을지라도,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깊은 외로움과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아무도 자신을 위해 애쓰려 하지 않는다는 절망감은 아이의 자존감을 짓밟고, 스스로를 사랑할 줄 모르는 어른으로 자라게 합니다. 

 

이러한 용서는 아이를 변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어둠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왜냐하면 그 용서 안에는 아이와 '같은 가족으로 함께 하기 위한 피 흘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고통과 희생이 담기지 않은 용서는 아이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제 나는 혼자다'라는 메시지만 전달할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쿨한 용서'의 한계입니다.

나는 상처받기 싫어서, 더 이상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아서, 상대의 잘못을 '잊거나' '외면'하는 것을 용서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상대방을 치유하고 관계를 회복하려는 진정한 사랑의 고통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부모는 자녀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설령 그 잘못이 부모에게 큰 상처를 주었을지라도, 절대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녀와 함께 하기 위해 피를 흘립니다.

자녀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자녀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자 애씁니다.

그 과정에서 부모는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하고, 마음 아파하며, 때로는 희생과 고통을 감수합니다.

한 가족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용서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진짜 용서인 것입니다. 

 

제노바의 성녀 가타리나(Catherine of Genova)는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과 세속적인 쾌락에 빠져 "행복한 날이 단 하루도 없었던 5년"을 죄악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결혼 10년째 되던 1473년, 고해성사를 받으러 간 성당에서 그녀는 황홀경에 빠져 자신의 죄악과 주님의 무한한 사랑, 그리고 그분께 자신이 얼마나 큰 고통을 드렸는지를 분명히 깨닫는 결정적인 체험을 합니다. 

 

며칠 후, 그녀는 다시 환시를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어깨에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데 온몸의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주님께서 사랑이 가득한 시선으로 가타리나를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피가 보이니? 이 피는 너에 대한 사랑과 네 죄에 대한 보속으로 흘리는 것이다!’” 

 

이 주님의 말씀은 가타리나를 전율케 했습니다. 그녀는 이 환시를 통해 자신을 용서하시기 위해

창조주께서 어떤 고통과 피를 흘리셨는지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 피는 그녀의 죄의 크기보다 훨씬 더 큰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회개하며 주님께 온전히 자신을 의탁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의 삶은 완전히 바뀌어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을 돌보며 주님과 "하나 된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성녀의 고백처럼, 우리를 만드신 분만이 우리를 용서할 권한이 있으시며, 그 용서는 바로 당신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이 피를 묵상할 때 우리는 비로소 '더 많이 용서받았다'는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마움에 그만큼 자신을 봉헌하며 그만큼 죄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이 열매 맺는 용서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관계를 지속하고 회복시키기 위한 '함께 하는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배반할 것을 아시면서도 가리옷 유다를 끊임없이 용서하셨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품어 안으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도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 23,34)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피 흘림을 동반하는, 끝까지 함께 하고자 하는 진정한 용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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