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 신학이 맞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 묵상을 시작하며 저의 책 홍보를 먼저 나누고자 합니다.
최근에 제가 쓴 『사랑하는 조카들아, 이것만 읽고 냉담하면 안 되겠니?』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정가는 22,000원입니다.
저자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출판사에서 이 책을 가져올 때 70% 가격으로 사 와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책을 10권 이상 구매하시는 분들께는 15,000원, 30권 이상은 14,000원, 50권 이상은 13,000원, 그리고 100권 이상을 구매하시면 12,000원에 드리기로 했습니다.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여러분이 많이 사실수록 저는 조금 더 가난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hasasy@naver.com으로 메일 주시기 바랍니다.
언제까지 지속할지 모르겠으나, 선교를 위해 제가 조금 더 가난해지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교구 사제는 수도자들처럼 가난 서원을 따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교구 사제는 가난하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 여기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제에게 가난은 너무나 당연하고 본질적인 것이라 굳이 서원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저도 서품 초기에는 가난한 사제가 되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핑계가 생겼습니다.
너무 많이 받고 살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아닐지라도 물질적인 면에서 부족함이 없고 오히려 너무 넉넉해서 죄책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저는 의식적으로 저 자신을 비우고 가난해지는 연습을 하려고 합니다.
이 책 판매도 그중 하나이고, 제게 불필요한 것들은 최대한 나누어 주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이렇게 명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루카 9,3)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이토록 무방비 상태로, ‘빈손’으로 보내셨을까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
우선 가르치는 처지에서, 가난하면 겸손해집니다. 부모도 선생도 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생계가 달렸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신자들이 주는 돈으로 삽니다.
자기 능력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사제가 되면 신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존재가 되어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는 받아들이는 처지에서 보면, 가난한 자의 선포만이 의미를 지닙니다.
겸손하게 만듭니다.
어떤 부잣집 아들이 유산을 노리고 부모를 살해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부모는 자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지만,
그 가르침이 자녀에게 스며들지 못했습니다. 가난으로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교만이 죽지 못했습니다.
가난은 선포할 하느님 나라의 권능이 그들의 소유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들을 보내신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거함입니다.
그들의 가난은 곧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의 표현입니다.
미래를 위해 부를 축적하며, 자신도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는데, 자녀가 어떻게 부모나 스승을 신뢰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이 진리를 잃어버릴 때, 설교자의 말은 공허한 메아리가 됩니다.
미국의 유명한 대형교회 목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조엘 오스틴의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늘 ‘긍정의 힘’을 설파하며, 믿으면 부자가 되고 성공할 수 있다는 ‘번영신학’으로 수많은 사람을 끌어모았습니다.
그의 말은 언제나 세상 부와 성공을 향한 희망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7년, 허리케인 하비가 텍사스주를 강타하여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그의 진면목이 드러났습니다.
그의 교회는 1만 6천 석 규모의 거대한 경기장을 개조한 것으로, 수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이재민들이 교회의 문을 두드렸지만,
교회는 ‘침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SNS를 통해 이 사실이 알려지고 비난이 폭주하자, 그는 마지못해 교회를 개방했습니다.
수십억 원짜리 호화 저택에 살면서 ‘긍정의 힘’을 외치던 그의 설교는, 정작 도움이 절실한 이웃의 고통 앞에서 힘을 잃고 위선적인 외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부유함이 그의 말을 무력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삶으로 가난을 증거한 이들의 말에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습니다.
지난 2024년 6월 선종하신 서울대교구의 유경촌 주교님을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겁니다.
주교품에 오르신 후에도 그분은 주교관이 아닌, 사제관의 작은 방에서 지내셨습니다.
주교를 상징하는 지팡이와 반지, 가슴 십자가도 꼭 필요할 때 외에는 거의 착용하지 않으셨고, 늘 낡은 가방을 들고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셨습니다.
받는 모든 돈을 봉투째로 어려운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월급 0원’의 주교님으로 불렸습니다.
유경촌 주교님의 강론은 특별히 화려하거나 수사학적으로 뛰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평범하고 소박한 언어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은 신자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왜일까요? 그분의 삶이 바로 강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청빈하고 겸손한 삶으로 증명되었기에, 그 어떤 웅변가의 말보다 강력한 힘을 가졌습니다.
사람들은 유 주교님의 모습에서 재물이 아닌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빈손의 목자’를 보았고, 그래서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모든 본당 사제의 수호성인이신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의 삶에서도 똑같이 드러납니다.
그분은 정규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강론 준비를 매우 힘들어했고, 설교 자체도 유창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전 유럽에서 사람들이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 아르스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바로 그의 극심한 가난과 희생의 삶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하루에 삶은 감자 몇 알로 끼니를 때우고, 딱딱한 나무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며, 하루 16시간 이상을 고해소에서 지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어눌한 말속에서 세상의 지혜가 아닌, 거룩한 삶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느님의 지혜를 들었습니다.
그의 가난한 삶이 그의 말을 ‘살아있는 복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빈손’으로 파견하신 이유는 명확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힘은 오직 우리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으로 채울 때, 즉 ‘가난’해질 때 주어지는 하느님의 권능입니다.
베트남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응우옌 반 투언 추기경님입니다.
그는 공산 정권에 의해 13년 동안 감옥에 갇혔고, 그중 9년을 독방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밤 손바닥에 포도주 세 방울과 빵 부스러기를 올려놓고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감옥 안에서 그리스도를 온전히 소유했습니다. 훗날 풀려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9년 동안 독방에서 살았지만, 그 순간들은 제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하느님과 단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난한 자만이 줄 수 있는 말의 힘입니다. 가르치면서도 가난하지 않다면, 지혜가 없으면서 지혜를 주려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가난은 가르치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지혜입니다.
지혜가 없다면 어떻게 지혜를 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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