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루카 11,29-32: 요나의 표징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29절) 선언하신다. 여기서 ‘악하다’는 말은 단순히 도덕적 타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고집에 사로잡힌 영적 완고함을 의미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기적을 보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것은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이다. 기적은 회개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단순한 구경거리가 아니다.”(Homilies on Matthew 43) 따라서 외적인 표징만을 갈망하는 태도는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교부들은 한결같이 요나의 체험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예표로 읽었다. 성 예로니모는 “요나가 바다의 심연에서 사흘 만에 살아 나온 것은, 무덤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Commentary on Matthew 12,40) 해석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 요나의 표징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미리 드러내는 그림자”(De Civitate Dei, 18권 30장)라고 설명한다. 요나가 니네베인들에게 회개를 선포했을 때, 이방인들이었던 그들은 말씀을 듣고 변화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들 가운데 계신 “요나보다 더 큰 이”(32절)를 거부했다. 여기서 드러나는 역설은, 종종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가장 멀리 서게 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비유로 남방 여왕(셰바의 여왕)을 언급하신다. 그녀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와서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자 했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 장면을 두고 “열린 마음을 가진 이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지혜를 찾지만, 닫힌 마음을 가진 이는 곁에 계신 지혜를 보지 못한다.”(Moralia in Job 28,3,7; Homilies on the Gospels 11)고 말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여왕을 하느님의 말씀을 찾고자 하는 모든 이방인의 모형으로 보아왔다. 이와 달리, 유다인들은 성전과 율법을 지니고 있었지만, “솔로몬보다 더 큰 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교리서 638-655항에서는 부활을 “우리 믿음의 중심 진리”, 곧 하느님의 결정적 표징으로 선포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원 역사에서 최고의 진리이자 결정적 표징이다. 십자가 죽음은 부활 없이는 무의미하고, 부활은 죽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651 참조) 결국 신앙생활은 기적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 안에서 내 삶이 변화되는지에 달려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처럼, “가장 큰 기적은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께 돌아서는 것”(Sermon 270,2)이다. 내가 변화되지 않으면 어떤 외적 기적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내가 회개하고 내 눈이 새롭게 열릴 때,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 은총의 표징으로 드러날 것이다. 날마다 회개와 변화의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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