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1,29-32
신앙인의 관계 손절 대상 1순위
얼마 전에 제가 성당 앞길에 서 있는데, 성당도 안 다니시는 어떤 분이 대뜸 성당은 왜 노숙인들을
위해 무료 급식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곧 예비자 교리가 시작한다는 저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무료 급식은 하나의 표징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이 표징을 요구한다면 그 사람과는 더는 대화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이 이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표징을 요구하는 악한 세대를 나무라십니다.
그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믿지 않는 하나의 핑계일 뿐이었습니다.
표징을 받을 자격이 된 이들은 먼저 말씀을 듣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러 온 남방여왕이나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이 그들을 단죄할 것이라 하십니다.
세상엔 정말 많은 믿을만한 표징이 있습니다. 세계 도처 어디를 가나 썩지 않는 성인들이나
성체 기적들이 널렸습니다.
예를 들면 루르드의 베르나데트 성녀는 몸이 썩지 않고 내장도 그대로 있습니다.
란치아노의 성체성혈 기적은 UN에서까지 조사를 해서 기적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래도 안 믿습니다.
믿기 싫으니까요.
이런 예는 수없이 많고, 심지어 신자들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제가 어떤 자매의 병자성사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남편의 외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암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죽기 직전까지 남편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며 의아해했습니다.
만약 남편의 외도가 행복해 보이지 않고 불쌍해 보였다면?
어떤 자매는 남편이 외도하는데, 매일 한 시간씩 성체조배를 1년 동안 했더니 남편이 불쌍해
보이더랍니다.
‘그게 뭐라고 자녀들과 아내, 회사 사람들에게까지 욕을 먹어가면서 그렇게 죄를
지을까?’ 하고요.
남편의 영혼 구원을 위해 저절로 기도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정상 아닐까요?
죄가 행복으로 보일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느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도 표징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어머니에 대한 믿음이 줄었을 때 저는 조금 더 죄에 집착하게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분명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나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강론할 때 아이들이 귀에 안 들어오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아이들의 행복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우선 죄가 고통임을 알려줄 예언자가 필요합니다.
저는 ‘하.사.시.’가 그런 예언자였습니다.
돈 많이 벌고 성공해서 예쁜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저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고통이었음을 깨닫게 해 준 책이 하.사.시.입니다.
먼저 이 설교를 듣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의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든 다윗 임금은 자신의 죄를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나탄 예언자가 찾아와 부자의 탐욕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자, 다윗은 크게 분노하며 “주님을 두고 살아 있는 한, 그런 짓을 한 자는 죽어 마땅하다.”라고 외칩니다.
바로 그 순간, 나탄은 다윗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선언합니다.
“그자가 바로 임금님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까맣게 잊은 채, 다른 사람의 죄(그것도 비유 속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불같이
의로운 심판관 행세를 했습니다.
자신의 거대한 죄를 ‘필요에 의한 선택’ 혹은 ‘왕의 권리’로 여겼기에 가능했던 위선이었습니다.
설교는 이 위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듣는 것입니다. 그러면 표징도 받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우구스티노 성인입니다.
젊은 시절 아우구스티노는 마니교에 빠지고, 쾌락을 추구하며 오랫동안 방황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공허하고 죄로 가득 차 있음을 지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오랜 습관의 사슬을 끊어낼 의지력이 없었습니다.
“내일은 꼭 끊어야지”라고 다짐하면서도 그 ‘내일’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주교를 만납니다. 그는 처음에는 주교의 뛰어난 웅변술에 끌렸지만,
점차 그의 설교를 통해 가톨릭 신앙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결단하지 못하고 정원에서 괴로워하던 어느 날, 어디선가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하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이를 하느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고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구절은 로마서 13장 13-14절,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그만두십시오.” 였습니다.
이 말씀은 그의 마음을 꿰뚫는 빛이 되었고, 그는 마침내 오랜 죄의 삶을 청산하고 회개합니다.
자신의 죄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말씀을 먼저 접하려고 하지 않는 자가 표징을 요구할 때 그냥 무시하면 됩니다.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는 자가 찾는 표징은 믿지 않는 핑계일 뿐입니다.
거기에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도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느님의 가르침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찾았습니다.
절대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 어른을 공경해서 모르는 어른에게도 인사해야 한다는 것 등입니다.
지금 여쭤보니 어머니는 그런 말씀을 하신 줄도 모릅니다.
저는 그래서 성경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특별히 ‘하.사.시.’의 말씀에 무관심한 이들은 일단 마음적으로 가까이하려 하지 않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이 전혀 없는 이들이라 나의 말도 먹히지 않고, 나의 사랑도 온전한 표징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가까이 해야 할 사람을 정할 때 우선 그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의 말이나 하느님 말씀에 조금이라도 귀 기울이는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며 표징만 보여달라는 이들은 우선은 멀리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런 이들을 ‘악하다’라고 했는데, 우리가 기꺼이 가까이 가면서 시간과 에너지를 소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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