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3주간 마사지 수업을 함께 들은 부부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가 흥미롭습니다. 배우자에게 마사지를 해준 사람과 마사지를 받은 사람 중에 누가 더 기쁘고 행복한가를 본 것입니다. 누가 더 기쁘고 행복했을까요? 마사지를 받은 사람이 더 행복했을 것 같지만, 결과는 똑같이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도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똑같이 감소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받는 데에 더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모의 자녀 사랑이 크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막상 자녀들은 그 행복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자기를 간섭하고 힘들게 한다고만 생각합니다. 부모가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으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받는 사랑은 느끼기 힘듭니다. 그래서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주는 사랑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역시 똑같은 행복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행복은 자기 의지만 확고하게 세운다면 얼마든지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사랑을 주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불행의 길로 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특히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종교 지도자들의 삶이 불행으로 가고 있음에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들의 삶이 다른 사람까지 불행으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의 뜻은 잃어버리고 형식과 외적인 모습에만 치중했습니다.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2)
바리사이들은 십일조를 매우 철저하게 지켜서, 심지어 정원에서 나는 아주 사소한 박하, 운향, 채소 등의 십일조까지 계산해서 마쳤던 것입니다. 대단한 종교적 열심입니다. 이 열심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율법의 가장 큰 정신인 정의와 사랑을 저버린다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만과 명예욕, 그리고 숨겨져 있는 죄들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의와 사랑에 기초한 겸손한 삶이고, 자기를 온전하게 주님께 드러내는 마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불행 선언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반대인 행복 선언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온전히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작지만 “고맙다.”라는 말에는 마법이 들어 있다(아나스 로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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