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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23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10-23 조회수 : 95

긍정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틴 셀리그만은 행복의 가장 믿을만한 원천으로 ‘관계’를 꼽습니다. 그의 행복 연구에서 긍정 정서를 자주 경험하는 사람의 88%가 인간관계를 핵심 요소로 꼽았다고 보고 합니다. 관계가 무너지면 삶의 만족도도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가족 안의 관계가 깨졌다면 과연 행복할까요? 오랜 친구의 배신으로 관계가 틀어졌습니다. 이때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를 용서할 수 없다면서 행복의 정반대로 나아갈 뿐입니다.


사실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할 때, 큰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인간의 한자어를 보면, ‘인(人)’은 두 개의 획이 서로 지지하며 서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간(間)’이 의미하는 사이는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형성된 좋은 관계를 의미합니다.


행복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관계를 깨는 데 집중하면 됩니다. 그러나 행복하길 원한다면 관계에 주목하고 잘 형성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통해 무엇인가 얻기만을 청한다면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가 없게 됩니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세요. 누군가가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서만 계속 내게 무엇을 청한다면 과연 그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가까이하기에 힘든 불편한 관계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 안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먼저 주님과의 관계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라고 말씀하십니다. 방화범이라고 자신을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불’은 하느님의 거룩함 앞에서 죄를 태우는 심판과 정화의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기억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 역시 그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 즉 복음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복음은 세상의 기존 가치관과 질서에 도전하며, 거짓과 불의를 태우고 진리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의 불은 ‘회개’로 사람들을 이끌며, 받아들이는 이와 거부하는 이를 가르는 심판의 역할을 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거부하시는 평화는 거짓된 타협이나 불의를 덮어두는 ‘좋은게 좋은 것’이라는 식의 평화입니다. 그러나 ‘불’인 복음은 진리 그 자체이기에 필연적으로 세상의 어둠, 죄, 거짓과 대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복음에 대한 응답은 이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보다 상위에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름으로 좋은 관계를 맺게 되면, 자연스럽게 인간관계 역시도 주님의 뜻에 맞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과의 관계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에게는 동물을 다스릴 권한이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지킬 의무가 있다(제인 구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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