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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2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10-27 조회수 : 156

루카 13,10-17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사는 법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주 당당하고 자유로운 한 분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그것도 모두가 지켜보는 회당 한가운데서, 18년 동안 허리가 굽은 여인을 고쳐주십니다. 

이 행동은 당대의 종교적 규범과 공동체의 암묵적인 룰을 정면으로 깨트리는, 그야말로 '눈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회당장이 분개하며 나섭니다. 그는 예수님께 직접 대들지는 못하고 군중을 향해

소리칩니다.

"일할 날이 엿새나 있으니, 그런 날에 와서 병을 고치시오!" 이 말은 사실 예수님을 향한 비난이었습니다.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며

"이 위선자들아!" 하고 호통치십니다.

"너희는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풀어 물을 먹이러 가면서, 18년이나 묶여 있던 이 '아브라함의 딸'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이 당당함, 이 자유로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우리는 왜 예수님처럼 살지 못할까요?

우리는 왜 늘 다른 사람의 시선에 갇혀, 그들의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눈치' 보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처럼, 나의 생존을 그들에게 맡겨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없다면 형제들이 부모가 됩니다. 

우리가 남의 눈치를 보는 이유는 단 하나, '생존'하기 위해서입니다.

공동체에서 쫓겨나지 않아야, 미움받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1950년대, 심리학자 솔로몬 애쉬(Asch)는 이것을 증명하는 유명한 '동조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은 간단합니다.

한 사람의 피실험자를 7명의 연기자 사이에 앉히고, 명백히 답이 보이는 선의 길이를 맞추게 했습니다.

처음 몇 번은 모두가 정답을 말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7명의 연기자가 일제히 명백히 '틀린 답'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자신의 눈으로는 A가 정답인 것이 확실한데도,

공동체(다른 7명)가 모두 B라고 말하자, 피실험자는 괴로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상당수의 사람이 결국 자신의 눈(진실)을 버리고, 공동체의 '틀린 답'(거짓)을 따라 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바보라서가 아닙니다.

이 공동체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찍혀 배척당할지도 모른다는 '사회적 생존 본능'이, 진실을 보려는 이성보다 더 강하게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눈치'의 메커니즘입니다. 

 

그런데 이 '눈치' 보는 삶이 일상이 될 때, 우리는 '가스라이팅'에 빠져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 나오는 주인공 '노라'의 삶이 바로 그 비극을 보여줍니다. 

 

19세기 말, 노라의 '사회적, 경제적 생존'은 전적으로 남편 '토르발'에게 의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받기 위해, 남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야만 했습니다.

토르발이 자신을 "내 귀여운 종달새", "작은 다람쥐"라고 부를 때마다, 노라는 그 '인형'이 되어 재롱을 부렸습니다.

그것이 자신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남편 토르발은 그런 아내의 의존적인 모습을 "여자는 남편에게 의지해야 아름답다"고 칭찬하며, 그녀의 독립적인 자아를 억압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서운 '가스라이팅' 입니다.

노라는 '생존'을 남편에게 맡긴 대가로, '눈치' 보는 인형이 되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비극은 단지 문학 속에만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도 자신의 생존을 '하느님'이 아닌 '사람'에게 맡겼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보십시오.

그는 '하느님'께 선택받은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왕권 유지가 '백성들의 지지'에 달려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아말렉과의 전투 후,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백성들이 탐내는 좋은 가축들을 살려둡니다.

사무엘이 그를 질책하자, 사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백성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의 말을 들었습니다."(1사무 15,24) 

 

'백성의 눈치'를 보다가 '하느님의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생존을 하느님이 아닌 공동체에게 맡겼을 때, 그는 왕이라는 정체성을 잃고 버림받게 됩니다. 

 

본시오 빌라도는 어떻습니까? 그는 예수님이 무죄라는 '진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생존'은 유대 지방의 안정과 '황제의 신임'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는 군중의 눈치를 봅니다.

바로 그때, 군중은 그의 약점을 파고드는 가스라이팅을 시전합니다.

"그 사람을 풀어주면, 총독님은 황제 폐하의 친구가 아닙니다!"(요한 19,12) 

 

결국 빌라도는 '진리'가 아닌 '생존'을 택합니다. 그는 군중의 눈치를 보며 진리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자신은 손을 씻으며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노라, 사울, 빌라도... 이들 모두가 자신의 생존을 '공동체'에게 맡겼기에 눈치를 보았고, 결국 자신을 잃거나 진리를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어떻게 그토록 자유로우실 수 있었습니까? [인형의 집]의 노라처럼, 그냥 그 공동체를 박차고 떠나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노라가 집을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이 '참된 보호자'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는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돌아갈 곳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존은 회당 공동체나 율법학자들에게 의존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생존과 정체성은 오직 '아버지 하느님'께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가 '부모'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공동체는 '형제'들입니다.

그런데 '참된 부모'가 없으면, 우리는 '형제'들을 '부모'로 착각하고 그들에게 생존을 의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그들의 눈치를 보는 노예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눈치 보지 않고 사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내 생존이 다른 누군가에게,

영원하고 절대적인 분에게 확실히 맡겨져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해리 포터] 이야기가 바로 이 과정을 보여줍니다. 고아인 해리는 이모인 더즐리 가족에게 얹혀삽니다.

그의 '생존'(음식, 잠자리)은 전적으로 이 '형제 같은' 공동체에 의존되어 있습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벽장 속에서 그들의 눈치를 봅니다.

더즐리 가족은 해리에게 끊임없이 가스라이팅을 합니다.

"네 부모는 쓸모없는 인간들이었고, 너는 정상이

아니야." 해리는 이 공동체 안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해그리드가 찾아와 폭탄선언을 합니다. "너는 마법사다." 

 

이것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너의 '참된 부모'는 너를 위해 목숨을 바친 위대한 영웅들이었다."는, 그의 '참된 정체성'을 알려준 것입니다.

자신이 '짐'이 아니라 '사랑받은 존재'였음을, 자신의 생존이 '희생'이라는 값을 통해 이미 보장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회당 공동체는 더즐리 가족처럼 예수님을 "안식일도 모르는 이상한 자"라고 가스라이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정체성과 생존은 이 땅의 공동체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사를 봉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미사는 '해그리드'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너는 세상의 눈칫밥을 먹는 고아가 아니라, 내 아들 예수가 목숨을 바쳐 구해낸 나의 자녀다!"라는 '참된 정체성'을 확인받는 시간입니다.

이 미사를 통해 나의 생존이 세상이 아닌 '아버지 하느님'께 보장되어 있음을 깨달은 사람은, 성당 문을 나서는 순간 더 이상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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