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5,1-12ㄴ
행복도 '간절히' 원해야만 방법이 보입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그 이름을 알든 모르든,
이미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는 모든 성인을 기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인이 되는 길', 곧 '참행복으로 가는 길'을 선포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놀라운 약속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면', 그 즉시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된다는 보상의 약속입니다.
행복해지려면, 마음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믿으려면, 우리 마음속에 아주 근본적인 갈망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오늘 강론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정말로 행복해지고 싶다" 는 '간절한' 열망입니다.
오늘 강론의 제목처럼, 우리는 '행복하려는 만큼'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저의 첫 기억은 할머니의 돌아가신 모습입니다. 어린 저에게 '죽음'은 엄청난 공포였습니다.
저는 그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불행하게 살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제 인생의 목표는 단 하나, '최대한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후회 없이 살고 나면, 밤에 잠자리에 드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꿀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잠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오늘'의 행복이 '매일의 죽음'(잠)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게 한 것입니다.
덕분에 저는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행복'을 향한 갈망이, 저를 이 사제의 길로 이끌었고 지금의 제가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도 계속 더 행복해지기 위해 나아갈 것입니다.
이 행복을 향한 갈망이 있다면,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말씀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 내가 더 행복해지려면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는구나. 온유해져야구나. 자비로워지고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구나.' 물론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이 '참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믿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저처럼 '간절히' 행복을 원할까요?
"행복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라고 묻는다면, 아무도 없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그 갈망이 '간절'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행복을 막연하게 원할 때, 우리는 두 가지 문제에 빠집니다.
하지만 왜 우리는 성인이 되지 못할까요?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는 '지금의 적당한 행복'에 만족해버립니다.
둘째,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끊임없이 '남 탓'으로 돌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행복'을 향해 단 한 걸음도 '발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이 정한 '거짓 행복'을 향해 달려가면서, '오늘' 자신이 점점 더 불행해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을 보십시오.
그의 '행복'은 '절대 반지', 즉 "My Precious"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유일한 '미래 목표'입니다.
그러나 그 목표를 추구하는 '오늘', 그의 삶은
어떻습니까? 그는 햇빛도 없는 동굴에서 생선을 날로 뜯어 먹고, '스미골'이라는 호빗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흉측한 괴물로 퇴보합니다.
그의 '오늘의 행복 게이지'는 편집증, 불신, 증오, 고독으로 매일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영화 ‘시민 케인’의 주인공 '찰스 포스터 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미래 목표'는 '세상을 통제하는 것', '모든 사람의 사랑을 돈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목표를 위해 '오늘'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제너두'라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아무도 없는 거대한 궁전에 스스로를 유폐시킵니다.
그의 '오늘의 감정 게이지'는 '극도의 고독'과
'분노'를 가리켰지만, 그는 자신의 불행을 "주변 사람들이 나를 실망시킨 탓"으로 돌렸습니다.
신화 속 '미다스 왕'은 '미래의 부'(황금)에 눈이 멀어, '오늘의 행복'(음식의 맛, 딸의 온기)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자신의 불행을 깨달았습니다.
골룸이나 케인, 미다스 같은 이들이 왜 '오늘' 자신이 점점 더 불행해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을까요?
자신들이 믿었던 '행복의 목표'(미래의 반지, 미래의 통제, 미래의 황금)를 너무나 철저히 맹신한 나머지, 자신의 '오늘의 감정 게이지'가 '절망'과 '고독'을 가리키고 있어도 애써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는 불행하다"고 인정하는 대신 "저놈 탓이야"라고 남을 탓하며 자신의 불행을 외면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미래의 자녀 성공', '미래의 은퇴 자금'이라는 목표를 좇느라, '오늘' 내 영혼의 행복 게이지가 '불안'과 '공허'를 가리키고 있는데도 애써 무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묻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참행복'을 간절히 원하게 됩니까?"
막연하게 "행복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골룸처럼 '미래의 쾌락'을 좇습니다.
그러나 '참행복'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오늘의 행복'에 집중합니다.
이 '막연한 원함'이 '간절한 갈망'으로 바뀌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바로 '죽음'이나 '절망'을 정면으로 마주하여, 내가 좇던 '미래의 행복'이 신기루였음을 깨닫는 '바닥 체험'(Rock Bottom)의 순간입니다.
제가 어릴 적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 '꿀잠'이라는 '오늘의 행복'을 간절히 원하게 되었듯이 말입니다.
이 '바닥 체험'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바로 '시민 케인'처럼 모든 것을 가졌던 사람,
레프 톨스토이입니다.
그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로 세계 최고 작가의 '명예'를 얻었고, 광대한 영지를 소유한 '부자'였으며, 건강한 '가족'도 있었습니다.
그는 골룸이나 케인이 좇던 '미래의 목표'를 모두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50세가 되었을 때, 그의 '오늘의 행복 게이지'는 '절망'과 '공포'로 바닥을 쳤습니다.
그는 ‘고백록’(A Confession)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내가 왜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나는 건강하고 행복한 가장이었지만, 내 삶이 멈추었고 숨을 쉴 수 없음을 느꼈다.
... 나는 밧줄이 걸린 방에 들어가지 않으려 했고, 총을 가지고 사냥에 나가지 않으려 했다.
자살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케인처럼 '남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오늘의 절망'을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이 절망의 원인이, 제가 그랬던 것처럼, '죽음' 앞에서 모든 '미래의 목표'(명예, 부)가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이 '오늘의 행복 점검'이 왜 우리를 성인으로 이끄는지 보여주는 가장 구체적이고 강력한
현대의 예가 있습니다.
바로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AA) 모임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미래의 완벽한 금주'가 아닙니다. 그런 '미래 목표'는 너무나 거대해서 오히려
'오늘'을 절망하게 만듭니다.
그들의 유일한 목표는 "오늘 하루(One day at a time) 술을 마시지 않고 평온하게 잠자리에 드는 것" 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오늘의 행복'입니다.
그들은 '오늘 마음이 불편한가?', '오늘 누군가를 미워했는가?', '오늘 정직하지 못했는가?'를 묻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분노, 원망, 거짓말, 죄책감을 해결하지 않으면, '오늘 밤'의 행복(평온)이 깨지고
다시 술을 찾게 됨을 뼈저린 '체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 밤 꿀잠'을 자기 위해, 필사적으로 '오늘' 용서를 청하고('자비로운 사람들'), '오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오늘' 정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며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노력합니다.
'미래의 성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밤'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오늘의 행복'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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