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통해야만 완성되는 인간
그리스 신화에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잃고 지하세계까지 내려간 오르페우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잘하는 능력으로 지옥까지 가서 죽은 에우티케아를 데리고 현실 세계로 올라옵니다. 그러나 지상의 빛을 보기 직전 '결코 뒤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법칙을 어기고 맙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오르페우스의 진짜 이야기는 그 '상실' 이후에 시작됩니다.
지상으로 홀로 돌아온 그는 깊은 절망 속에서, 에우리디케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지 못했던 그 순간을 평생토록 고통스럽게 되새깁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그 고통을 통해 정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는 에우리디케 외에 다른 어떤 여자의 사랑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즉, 그는 자신의 실패에 대한 대가로, '세상 모든 여인에 대한 자신'을 비워나가는 고통스러운 정화의 길을 걷습니다.
결국 그는 다른 여인들의 사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광분한 여인들(마이나데스) 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임을 당합니다.
그는 한 여자를 얻기 위해 자신을 버리지 못했으나, 그 여자를 잃은 고통을 통해 평생 다른 모든 것을 버려가며, 마침내 자신의 죽음으로 그 사랑을 '완성'하게 된 것입니다.
오르페우스의 비극은 "관계를 통해서만 인간이 완성된다"는 진리를 피로써 증명합니다.
설사 상실의 고통을 겪더라도, 그 과정 자체가 낡은 나를 '죽이고'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나로
정화시키는 용광로가 됩니다.
이 이교도 신화가 보여주는 고통스러운 자기 정화의 여정은, 놀랍게도 사도 바오로가 신앙 안에서 처절하게 고백했던 우리 안의 영적 싸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정녕 저는 제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저는 제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제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 아, 저는 정녕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신에서 저를 구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로마 7,15. 24)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나', '죽음의 육신'이 바로 오르페우스가 뒤돌아보게 만든 '불안'이며,
에덴동산의 '뱀', 즉 '나 자신(Ego)'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내 안에 도사린 이 뱀, 이 끈질긴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형은 어떻게 집행됩니까? 그것은 바로 '관계 맺음'을 통해서입니다.
모든 관계에는 상대가 원하는 만큼 나를 죽여야 하는 의무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행위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 나의 시간, 나의 고집, 나의 자존심, 나의 '뱀'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기 비움'의 실천입니다.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 만큼, '나'는 죽어갑니다.
즉, 내가 용서하기 싫은 사람을 용서하는 그 순간이, 나의 '뱀'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이며,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실 공간이 넓어지는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자기 비움'의 역설을 가장 강렬한 언어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6)
이 말씀은 '자기 목숨'으로 상징되는 나의 가장 깊은 '자아'까지도, 하느님과의 절대적인 관계 앞에서 기꺼이 비우고 내려놓으라는 촉구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나'를 비우지 않으면 상대를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하느님이야 어떻겠습니까?
관계란 마치 내가 버리는 무언가의 공간에 상대를 끼워 넣는 과정과 같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버려야, 비로소 그분 전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를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한다면, 어떤 것도 되기를 원하지 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기 비움'의 관계 맺음을 끝까지 완수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구약 요셉의 이야기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요셉은 어렸을 때부터 순수하고 착했지만, 완전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를 형제들로부터 배신당하게 하십니다.
갖은 고난 끝에 마침내, 자신을 팔아넘기려 했던 형제들, 아니 자신을 죽이려 했던 그 '원수' 같은 형제들을 만나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자신을 버렸던 형제들을 '축복'하는 장면이야말로, 한 인간이 '자기 비움'을 통해 '원수 사랑'이라는
관계의 정점에 도달하며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완성'되어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은 오직 '관계'를 통해서만,
즉 '십자가로 원수까지 사랑하며 나 자신을 죽여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오르페우스처럼 실패하고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내 안의 '뱀'을 보며 절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지치지 않아야 합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 당신을 위해 저희를 만드셨기에, 저희 마음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는 불안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불안은 '나'를 비우고 '당신'을 채려는 영혼의 몸부림입니다.
나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비워진 자리에 하느님과 형제들을 채워 넣는 '사랑의 관계'를 실천함으로써, 주님 안에서 정화되고, 자유롭고, 참된 완성으로 나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