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의 날’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 수행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다고 선포하신 다음(어제 복음 말씀), 이제 이 나라에 대한 보충 설명을 이어 가십니다. 곧 ‘사람의 아들’이 당신의 날에 오실 때에,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최종적인 성취를 설명하십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눈앞에 두고서도, 삶을 즐기고자 노력하는 존재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심고 짓고 등, 노아의 때 또는 롯의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 활동들은 일상적인 것들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때가 올 때까지 충만하게 산다는 인상을 주는 열정적인 활동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오는 날은 은혜로운 날만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삶을 사는 한편 자연스럽게 회개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불안한 날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그날을 본 적이 없고 체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날을 내다보고 마음에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역사는 우리에게 최소한 두 가지 인상적인 예를 제공해줍니다. 노아의 때와 롯의 때에, 하느님의 심판이 땅의 사람들과 소돔의 주민들에게 갑자기 들이닥쳤습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 가공할 세력으로 인식되던 물과 불이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습니다.”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도, 지금에 이르기까지, 물과 불은 여전히 전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모든 것을 파멸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날, 삶에 아무리 필요한 요소라 하더라도, 포기해야 합니다. 롯의 아내를 보면, 모든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녀는 마지못해 남편을 따라나섰으나, 마음은 포기하고 떠난 것들에 매여 있었기에,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는 운명을 맞이했습니다(창세 19,26).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여 매여 있다면, 그 운명은 파멸일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주는 예입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유일한 사건, 심판하기 위해서 오시는 주님 앞에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을 보장받는 일에 달려 있습니다. 시선을 늘 주님께 두고 일상적인 일들을 성심성의껏 처리해나가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적합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나, 뒤를 돌아보는 일에 마음이 뺏겨 대응해나간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멀어져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끝으로, ‘사람의 아들의 날’에 관한 가르침을 접한 제자들은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은, 어제 바리사이들이 던진 “언제?”라는 질문에 버금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사한 점을 들어 답하십니다. 그날은 모든 이를 대상으로 하는 심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심판을 받을 것이기에, 누구도 심판을 피해 별도의 안식처를 마련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하루, 당장 그 마지막 때가 내게 닥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정성껏 심는 자제로, 하느님을 마음 한가운데 모시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하루, 이런 날들이 쌓여 지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맛보고 희망하며 살 수 있는, 은혜로운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내 마음이, 나아가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하느님을 모시고 있으면, 그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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