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찾아오신 때
이스라엘을 성지 순례하다 보면,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 올리브산 중턱에 ‘눈물’ 모양으로 건축된 작은 기념 성당 하나를 방문하게 됩니다. 경내 입구에 위치한 흰색 표지판에는 Dominus Flevit(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흔히 ‘눈물 성당’이라 부릅니다. 성당 내부 구조도 특이한데, 미사를 봉헌할 때 예루살렘을 내다볼 수 있도록 전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의 멸망을 애도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설계된 구조로 보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에서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순례자들은 도성 가까이 이르자, 해오던 대로 시편 122편 ‘순례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집으로 가세. …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를 빌어라….” 그러나 예수님은 도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다윗이 여부스족을 몰아낸 다음 수도로 삼고, 뒤를 이어 솔로몬이 성벽과 성전과 왕궁을 건축한 이래, 예루살렘은 정치적이며 민족적, 종교적인 중심지로 자리합니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하느님의 거처로서의 예루살렘 성전이 강조되면서 예루살렘의 신성불가침 사상이 싹트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사상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이 성전에 머무신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하느님이 성전에 머무실 수 없다면,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성전은 한낱 인간이 세운 건조물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언자들은 정의와 진리와 평화를 멀리하던 백성을 향해 일찍부터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어, 기원전 6세기 초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수많은 지도 계급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떠나 오십 또는 육십 년에 걸친 처절한 바빌론 유배생활을 거쳤음에도, 크게 변한 것은 없었습니다. 때가 되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현존은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요 호소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개를 거부하는 예루살렘 주민들의 결심으로 당신이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시게 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함으로써, 도성을 파괴로부터 구하시는 데 무력한 존재로 머무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눈물을 흘리십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상태를 고집하는 이 양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을 되찾아 기쁨을 나누는 감정과 같은 모습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순례자들이 도성의 평화를 위해 노래하는 동안, 예수님은 백성, 특히 백성의 지도자들의 눈을 닫아 버린 오만과 자만을 애도하십니다. 이들은 결코 평화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파괴 예언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던 70년의 예루살렘 함락에 관한 세세한 점들을 기초로 합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예고가 선포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해방을 선사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려 하시나, 사람들은 이 구원의 선물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아들을 살해할 것이며, 믿음이 아니라 불신의 열매를 거두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 진노의 심판은 더는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은 인간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고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에, 지금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 역시 예루살렘의 주님들과 같은 모습을 고집한다면, 슬픔, 나아가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마냥 부족한 존재이지만, 회개하여 하느님을 향하는 것 자체가 그분의 뜻임을 마음에 새기며, 오늘 하루 하느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의 뜻을 살피며 채워나가는, 귀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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