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강의를 종종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저의 강의 스타일은 강연 대에 가만히 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왔다 갔다 하면서 강의합니다. 어떻게 보면 정신없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어느 성당에 특강 하러 갔다가, 특강 전에 수녀님께서 신자들을 나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귀한 강사 신부님 모셨는데, 뒤에만 앉아 있지 말고 앞으로 가서 앉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조한 말, “이것은 예의가 아니에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앉는 자리 때문에 굳이 혼날 필요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성당까지 와서 잔소리를 들어야 할까요? 또 오는 순서대로 앞에 앉을 필요가 있을까요? 자기가 앉고 싶은 편한 자리도 있을 텐데 말이지요. 이런 제약을 받으면 강의 시간 내내 불편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수녀님께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돌아다니며 강의할 테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때부터 저의 강의는 돌아다니면서 하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이 제게 오는 것이 아니라, 제가 그들에게 다가서는 것입니다. 그보다 신나게 반응해 주시는 열정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시지 않습니까? 어디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려는 열정만 있으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당시 세관장은 로마에 협력해서 동족의 세금을 뜯어내기에 세리들보다도 더 큰 죄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따라서 부자였지만, 그 부는 착취를 통해 얻은 부정한 재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자캐오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군중이 그를 가로막았지만, 체면을 버리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갑니다. 성인 남성이, 특히 부유한 세관장이 나무에 오르는 것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는 수치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만큼 그의 예수님을 보려는 열망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열망이 예수님의 주목을 받습니다. 군중이 그를 ‘죄인’, ‘세관장’으로 보고 있지만, 예수님은 ‘자캐오’라고 부르면서 한 인격체로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얼른 내려오너라.”라고 하시지요. 지체할 수 없는 구원의 시급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라고 하십니다. 자캐오가 예수님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머무르겠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먼저 내미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캐오는 기쁘게 응답합니다.
맞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구원의 손을 내미시며 다가오십니다. 그렇다면 그 손길을 어떻게 응답하고 계십니까? 이 응답을 자캐오처럼 어떤 장해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보려는 열망이 가득해야만 가능합니다. 체면 때문에, 사람들의 방해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려는 열망 자체를 포기한다면 구원의 손을 잡을 수 없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열망이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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